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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예천옛길

한봄김국빈 2011. 6. 16. 11:29

[옛길기행] <22>영남대로 예천옛길
三山三水 만나는 삼강나루, 주인 잃은 주막만 외로이…
 
 
 
영남대로는 옛날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다니던 길이었다. 부산의 동래에서 서울의 남대문에 이르는 천리 길이다. 하지만 현재 영남대로 길은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다.

영남대로 예천구간은 지보면 대죽리~지보나루~의성 다인 진도나루~반정고개~풍양면 우망리~흥국재~삼강나루를 잇는 60리(24㎞) 길이다. 곧장 가면 문경의 토끼비리길이 나온다. 이 길은 문경새재와 연결된다.

당시 예천읍을 비롯한 풍양면`지보면`호명면 등 예천 남부지역과 안동`의성지역 주민들은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갔다. 숲길과 강변길이 있고,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나루가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묵어가던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도 있다.

예천군은 최근 전문가와 함께 예천 지보나루~다인 진도나루~반정고개~풍양 흥국재~삼강나루를 잇는 옛길 13㎞를 답사하고, 관광객들이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영남대로 한양과거길’이라고 적힌 표지를 나뭇가지 곳곳에 부착해 놓았다. 100년 전 금의환향을 꿈꾸며 한양 과거 길에 올랐던 영남선비를 생각하며 이 길을 걸어봤다.

◆퇴계 선생의 외가 지보면 대죽리와 강변 반촌 신풍리

안동과 예천의 경계는 구담과 암천이다. 지방도를 곧장 지나면 퇴계 이황 선생의 외가가 있던 대죽리가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한대(閒大)라고 적혀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나무의 절개를 지킨 선비들이 은둔한 곳이다.

임진왜란 전후 밀양 박씨와 인천 채씨, 춘천 박씨가 살았다. 후에 김녕 김씨가 들어와 서쪽에 집성한다. 임란 의병장 이개립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즐비하다.

이 마을이 퇴계 이황 선생의 외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퇴계 선생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서 이곳까지는 20리 길이다. 어린 퇴계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친정 길을 고단하게 다녔을 것이다.

안동시 구담을 지나면 도로변에 예천 지보면 신풍리 마을이 나타난다. 파평윤씨 집의공파 집성촌이다. 유교적 문화 색채가 배인 마을임에도 교회의 탑이 둔덕에 우뚝 솟아있다. 그 아래 지붕이 뾰족한 집 두 채가 나란히 있다. 귀향한 서양화가 꾸민‘갤러리 윤’이란 작은 미술관이다. 남쪽 강변에 있는 한옥은 웅장하고 멋스럽다. 신축한 죽고서원이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도장리가 있다.

◆조선8대 명당 정묘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익장마을) 태울산에 ‘정묘’가 있다. 풍수상 길지로 조선 8대 명당에 속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단정히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마주한 비봉산에다 낙동강이 흐르니 절묘한 음양의 조화를 이룬 명당이라는 것이 풍수가들의 얘기다. 정묘는 낙동강 1,300리에서 4대 길지에 속한다. 안동 천전의 옛 집터인 완사명월형의 학봉선생 종가, 하회마을 연화부수형의 서애 대감 생가터, 안동댐 초입의 고성이씨 종가인 임청각 고택 등은 양택 길지이다.

정묘의 주인은 직제학을 지낸 정사. 이후 동래 정씨에서 배출한 정승만 17명이다. 조선조 500년간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가문이 전주 이씨이다. 22명을 배출했다. 안동김씨는 19명이다. 전자는 왕족이었고, 후자는 세도정치에 힘입은 바 있으니 동래정씨가 돋보인다.

익장마을에는 정사의 후손 석문 정영방의 종가가 있다. 조선 4대 별서정원이다. 이 곳 석문 종가는 문화재이다. 이 가문이 번성할 때는 용궁군 일대 사방 100리의 땅을 소유한 만석꾼이었다고 한다. 마을 한복판의 지포강당은 석문이 강학하던 장소이다.

◆지포팔경

지포는 지금의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의 별칭이다. 불리기(拂里基)라고도 한다. 옛날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오지만 절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후세 사람들이 부처가 있었던 터라고 해 '불리기'라고 했다. 도남 조윤제 박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불리기 앞을 뱃가라고 하고 건너편을 진도나루라고 부른다. 농경시대 시장과 풍물의 교역이 빈번했던 곳이었다. 주막이 서너 채 있었으나 1970년대 진도나루와 함께 없어졌다.

비봉산이 보이는 지보리는 일찍이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궁핍하던 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1906년이었다. 증경총회장 양화석 목사의 조부 양주사와 계명대 총장을 지낸 김태환 박사의 선친 김장로, 전성천 박사의 백부 전장로가 의성 안계장에 갔다가 전도를 받아 온 뒤부터 이 마을에 기독교가 성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자녀들을 유학 보내 박사가 많이 나왔다. 대한광복단 비밀결사대에 참가해 항일투쟁을 한 조용필 지사, 도남 조윤제 박사, 김태환 계명대 총장, 조운제 고려대 교수, 양화석 목사, 양재휘 경북고교장과 최근의 조현오 경찰청장, 조현천 육군소장, 조현설 서울대 교수 등이 모두 지보리 출신이다.  

지보리에서 강을 건너면 의성 땅이다. 비봉산 북쪽 기슭 의성군 다인면 용곡1리에서 봉산서원 옛터를 지나 28번 국도를 따라 10분쯤 가면 덕미리가 나온다. 마을 안으로 접어들어 민가를 지나 북서쪽 산길을 오르면 반정고개 가는 옛길이다. 산길은 옛길을 넓혀 넓어진 농로가 됐다. 700m쯤 올라가면 길 오른쪽 나무 사이로 바위가 보인다. 조선 후기 윤정식 예천군수의 선정비이다. 다인면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은 잊혀진 마애비이다. 여기 반정고개에 새긴 것을 보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정승을 배출한 포내(우망)

예천군 풍양면 흔효리 효자동에서 들을 지나 북으로 향하면 우망이 나온다. 우망은 동래정씨 동성마을로 반촌으로 알려졌다.

마을 남쪽 강변에는 입향조 정귀령이 지은 삼수정(도문화재 486호)과 동래정씨 문중의 자랑인 쌍절각이 있다.

세태는 변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망’을 양반동네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부터 관리와 학자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난 반촌은 어김없이 풍수가에서 말하는 길지의 지형이 있다. 우망은 소가 누워 달을 보는 형국이다. 여기서 우망이 나왔다. 고종 때 포내에서 지금의 우망으로 바뀌었다.

삼수정을 지나면 낙빈 정지의 종가가 나온다. 흥국재 올라가는 입구에 그의 제사가 나온다. 마을 북편에 전 교통부 차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정진동씨의 생가가 있다. 서편에는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정진형씨의 생가이다. 500년을 이곳에서 살아 종가도 여러 집이다.

◆삼산삼수(三山三水)가 만나는 삼강나루

강의 길목에는 나루가 있다. 나루에는 어김없이 주막이 있었다. 주막은 막걸리와 만날 때 맛과 멋, 흥이 있다. 나루에는 보부상의 잠자리도 있다. 낙동강 1,300리 마지막 남은 주막 삼강주막에는 고인이 된 주모 유옥련 할머니의 주름 잡힌 얼굴사진이 주막 마루 위에 걸려 있다.

나루를 건너면 문경 땅이다. 이렇듯 영남대로는 문경새재로 이어진다. 선비에게는 입신양명의 길이었다. 올라갈 땐 희망을 안고 갔다가 낙방의 쓴 고배를 마시고 돌아오는 절망의 길이기도 했다. 고달픈 삶을 살았던 민초들, 머리와 등에 무거운 업장 같은 등짐을 나르던 보부상, 이 강을 건넜고 이 길을 갔다. 발길 따라 물길 따라 애환만 남은 주막에는 오랜 세월로 마루에 먼지만 수북하다.

예천`권오석기자 stone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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