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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미귁 말싸메 침략당하고 있도다

한봄김국빈 2014. 11. 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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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세종대왕의 탄식…나랏말싸미 미귁 말싸메 침략당하고 있도다

  • 조화유
    재미(在美)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E-mail : johbooks@yahoo.com
    경남 거창 출생. 부산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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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10.0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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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사 직원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그가 한국 관광객들에게 워싱턴 관광을 안내할 때 백악관 앞에서 잠시 기념사진들을 찍게 했다. 그 때 마침 오바마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러자 한 남자분이 옆에 있던 미국인 관광객한테 영어를 써보고 싶었던지 ‘디스 이즈 오바마 헬기 유노?’라고 했다. 그러자 미국인은 ‘헬기? 왓 이즈 헬기?’라고 하더란다. 한국에서는 헬리콥터도 낱말이 길다고 ‘헬기’로 줄여 쓰는데, 엊그제 한국의 어떤 일간신문은 1면 머릿기사 제목을 ‘북 고위급 방한은 남북관계 터닝포인트’라고 달았다. ‘전환점’이란 우리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글자나 긴 ‘터닝포인트’를 썼다.

    이 신문은 얼마 전엔 스쿨런(school run:학부모가 자녀들을 차에 태워 등교시키는 것)을 학교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뜻으로 잘못 썼고, ‘섀도 닥터’란 영어에도 없는 말을 만들어 제목으로 쓰고는 ‘대리의사’란 설명까지 붙였다. shadow a doctor (의사 지망생이 의사를 따라다니며 배우다)란 말은 있어도 shadow doctor란 명사는 없다.

    최근에는 또 모든 신문, 방송들이 ‘제2롯데월드 프리오픈’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제2’만 빼놓고 전부 영어다. 롯데월드는 고유명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프리오픈이 뭔가? ‘시험개장’이라고 우리말로 하면 될 것을 꼭 프리오픈(pre-open)이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나?

    필자가 1980년대 한국에 나가 내 책의 국내 출판을 계약할 때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그 회사 상무가 나에게 점심 대접을 했다. 그 자리에서 상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진짜 조화유 선생님 맞습니까?”라고 웃으며 물었다. 느닷없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하자 그는 “선생님이 오늘 저희와 같이 계시는 동안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셔서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재미동포들이 한국에 나가서는 미국물 좀 먹었다는 티를 내느라고 영어를 찍찍 섞어 쓰곤 했는데, 그것을 국내에 계신 분들이 매우 듣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날 세종대왕의 탄식…나랏말싸미 미귁 말싸메 침략당하고 있도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나 글 쓸 때 영어 한 두마디 섞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이 되었다. 신문, 방송, 인터넷, 심지어 거리의 광고와 아파트 이름에까지 영어가 넘쳐나고 있다. 한국서 쓰는 어떤 ‘영어’는 미국에서 수십년 살아온 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스킨십, 원샷, 스펙, 블랙컨슈머, 리베이트, 아이돌 가수, 세리 키즈, 연아 키즈 등등 영어 같긴 한데 영어 원어민들이 이해하는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 상당히 많다.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을 왜 굳이 영어로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국 TV드라마에서 어떤 포장마차 안에 ‘물은 셀프하세요’라고 써붙여 놓은 걸 보았다. 물은 손님이 직접 정수기에서 받아 마시라는 뜻인 것 같다. 또 국정원이 ‘셀프 개혁안을 내놓았다’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물은 직접 받아 마셔요’ ‘자체 개혁안을 내놓았다’라는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영어 self를 ‘셀프’라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옮겨 우리말에 대신하고 있다. 또 기분이 ‘좋아진다’를 기분이 ‘업된다’고 하고, 국격을 ‘높인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업그레이드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지극한 모국어 사랑은 19세기 소설가 알퐁스 도오데의 작품 ‘마지막 수업’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프랑스는 자기 나라 안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외국어 상업광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어를 지키기 위해 1975년부터는 특히 공문서, 과학서적, 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 ‘올리버 트위스트’ 등 수많은 소설을 써서 쉐익스피어 다음으로 유명해진 영국 작가 차알스 디킨스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어가 어려워 영어로 글 쓰는 건 정말 힘들어. 아이고, 항상 아름다운 프랑스어로만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The difficulty of writing English is most tiresome to me. My God! If only we could write this beautiful language of France at all times!)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그 좋은 우리말 놔두고 기를 쓰고 어려운 영어로 바꿔 쓴다. 아파트 이름을 영어나 불어로 쓰는 것은 점점 더 심해져서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골서 올라온 시어머니가 찾지 못하게 일부러 외국어로 아파트 이름을 짓는다는 농담도 있지만, 외국어 좀 한다는 나도 한국 아파트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다. 며칠 전 신문에서 한국 최고가격 아파트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외국어로 된 그 아파트 이름이 지금 이 순간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순수한 우리말로 ‘참좋아 아파트’, ‘햇볕가득 아파트’, ‘꽃동산 아파트’, ‘산들바람 아파트’, ‘좋은이웃 아파트’…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우리말로 지으면 기억하기도 좋을 텐데 말이다.

    제2롯데월드의 안내문을 보니 ‘에비뉴 엘 동’ ‘캐주얼 동’ ‘엔터테인먼트 동’ 등 건물 이름이 동(棟) 빼놓고는 전부 영어다. 또 ‘수족관’이라 하면 될 걸 굳이 엉터리 영어발음으로 ‘아쿠아리움’이라고 써놓았다. 이런 것도 우리말로 먼저 건물 이름을 짓고 외국인을 위해서는 영어로도 그 건물의 특성을 말해주는 명칭을 영어로 바로 써주면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엔터테인먼트’ 대신 ‘연예동 Entertainment Center’ 같이 쓰면 우리나라 고객과 외국 고객이 다 알아보는 명칭이 될 것이다. 물론 중국어나 일본어로도 옆에 같이 써붙이면 더 좋을 것이다.

    한글날 세종대왕의 탄식…나랏말싸미 미귁 말싸메 침략당하고 있도다
    언론 매체들 용어도 영어 천지다. ‘일괄처리‘라고 하면 될 걸 ‘패키지 처리’, ‘도시 군복 스타일’이라고 하면 될 걸 ‘어번 밀리터리 룩’, ‘맹수사냥복 스타일’을 ‘사파리 룩’, ‘직장인 스타일’을 ‘오피스 룩’ 등등 사진에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운 팀(team) 같은 것은 몰라도 얼마든지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것까지 영어로 쓰려고 애를 쓴다. ‘특팀’ 또는 ‘특위’라고 하면 될 걸 꼭 TF라고 한다. Task Force(원래 군사용어로 특공대란 뜻)를 줄인 것 같으나 미국서도 그리 흔히 쓰지 않는 말이고 더구나 TF라고 잘 줄여 쓰지도 않는다.

    한국 정부관리들이나 기자들도 ‘에너지 바우처’, LTV와 DTI 같은 말을 마구 쓰고 있는데, 이거 제대로 알아들을 국민이 몇이나 될까? ‘난방비 보조금’ ‘주택가격 대비 융자비율’ ‘소득 대비 부채비율’이라 하면 다 알아들을 말을 굳이 영어로만 써대는 이유를 모르겠다. 또 launching(을로온칭)을 ‘런칭’ 또는 ‘론칭’이라고 써서 ‘창업’ ‘출시’ ‘개업’ 등의 뜻으로 쓰고 있다.

    패러다임(paradigm)은 사고방식 또는 발상, 시너지(synergy)효과는 상승효과, 리더쉽(leadership)은 지도력, 가이드라인(guideline)이나 매뉴얼(manual)은 수칙 또는 조작법, 로드맵(road map)은 계획표, 매니페스토(manifesto)는 공약 또는 선언, 스쿨존(school zone)은 학교지역, 엠시(MC)는 사회자, 모기지(mortgage)는 주택담보융자, 인센티브(incentive)는 유도성 보상, 스모킹 건(smoking gun)은 결정적 증거로 쓰면 더욱 뜻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interchange)를 나들목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고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이름도 그 뜻이 분명하지 않거나 웃기는 게 많다. 대표적인 것이 SBS의 ‘스타킹’이다. 나는 처음 이 타이틀을 보았을 때 여성 용품 소개하는 쑈인 줄 알았다. 영어로는 stocking(여성 양말)이 아니라 Star King인 모양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 스타 중에서도 으뜸가는 스타라는 뜻이라면 top star 또는 superstar라고 해야지 star king은 아니다.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스타 같은 인기가 있는 왕’이란 뜻은 될 수 있다.

    우리말에 영어를 마구잡이로 수입한 주범은 누구일까? 아마도 영어 좀 한다고 티내고 싶어하는 일부 언론인들과 미국 유학 또는 미국 파견 근무하고 돌아온 공무원과 회사원들, 한국에 자주 드나드는 해외동포들, 그리고 이른바 미드(미국 드라마) 번역하는 사람들 등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중에 특히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일부 언론인들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언론매체들은 미국 소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리베이트(rebate/합법적 환불)를 ‘뇌물성 환불’이란 나쁜 뜻으로 오랫동안 써왔다. 언론이 리베이트를 잘못 쓰니까 법무부까지 ‘의약품 리베이트 전담수사반’ 같은 명칭까지 쓰고 있다. 합법적이고 좋은 환불 리베이트를 수사하다니, 영어하는 외국인들이 보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더욱 웃기는 것은 국립국어원이 만들었다는 국어대사전도 ‘리베이트’를 ‘뇌물성 환불’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거의 10년 전부터 신문기고문 등을 통해 꼭 영어를 쓰고 싶으면 rebate 대신 kickback(킥백/뇌물성환불)을 쓰라고 권고했더니 이제는 ‘리베이트’ 대신 "뒷돈’이란 우리 말을 쓰고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몇 주 전에도 두 방송사가 리베이트를 또 썼다. 회사 차원에서 리베이트를 쓰지 말라는 지시가 없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또 스펙, 스킨십, 블랙컨슈머, 원샷 등이 아주 많이 쓰이고 있다. ‘스펙’이라고 발음 되는 영어 단어로 spec과 speck이 있다. spec은 ‘투기’ 또는 ‘요행’을 뜻하는 speculation을 줄인 것이고, speck은 ‘얼룩, 오점, 과일 썩은 부분’을 가리킨다. specifications(기계의 제원, 상세설계도)를 줄여 specs라고는 한다. 그러나 specs나 spec 이 이력이나 경력, 자격증이란 뜻으로 원어민들은 절대 쓰지 않는다. 필자가 스펙 쓰지 말라고 했더니 요즘 신문들은 스펙(학력, 경력, 자격증 등)이라고 괄호안 설명을 덧붙여 쓰고 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스펙’ 포기하면 된다.

    ’스킨십’도 마찬가지다. 영어에는 skinship이란 단어 자체가 없다. 그러나 한국서는 ‘이성간의 신체적 접촉’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접촉’ 특히 의사와 환자, 정치인들과 유권자들 간의 직접대화 등의 뜻으로 쓰고 있다. 어떤 신문기자는 ‘대통령은 스킨십이 더 필요하다’고 썼다. 스킨십이라면 어쩐지 좀 외설적인 느낌이 들어 듣기 매우 거북하다.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는 한국에서 ‘악덕소비자’ 란 뜻으로 쓰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흑인소비자’란 뜻은 될 수 있어도 ‘악덕 소비자’란 뜻으로는 쓰지 않는다. ‘원샷’은 영어로 one shot일 것인데, 미국에서는 위스키 같은 비교적 독한 술 ‘한 잔’이란 뜻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서는 이것이 ‘단숨에 술을 들이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뜻의 영어는 chug(처어그) 또는 chug-a-lug(처어갈 럭)이다.

    한국 언론 매체들은 또 영어를 부정확하게 번역해서 쓰기도 한다. 그 한 예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나는 이게 ‘외상 술 퍼먹고 나서 빚 갚을 걱정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라는 뜻의 농담인 줄 알았더니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었다. 문제는 trauma(트로오마)를 외상(外傷)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traum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 것, 다른 하나는 심한 신체적 부상이다.

    그런데 PTSD의 traumatic은 큰 정신적 충격만을 가리킬 때도 있고, 큰 부상과 그로 인한 심한 정신적 충격까지 합친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9.11테러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신체적으로 부상을 당했거나 부상은 당하지 않았어도 그 엄청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오랫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다면 그런 상태를 PTSD라 한다. 그러므로 PTSD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는 건 절반의 번역에 불과하다.

    한국 언론은 또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범죄행위를 보도할 때 ‘도덕적 해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이것은 moral hazards를 번역한 것 같은데 moral hazards는 도덕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공기업체 간부가 협력업체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은 범죄행위이지 moral hazards가 아니다. 이건 원래 보험용어다. 예컨대, 자동차를 임대해 쓸 때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가입하지 않은 사람보다 자동차 사용에 주의를 덜 기울인다. 접촉사고가 나도 보험금으로 수리가 되니까 차를 마구 굴리게 되고, 사고가 나면 결국 보험사가 손해를 보게 된다. 이런 것이 moral hazards다. 보험사가 보험료를 산정할 때는 moral hazards를 참작한다. 따라서 moral hazards를 ‘도덕적 해이’라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종대왕께서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한자로 글 쓰기가 어려우니 이를 불쌍히 여겨 한글을 만들어 주었더니, 이 우수한 한글을 가지고 영어를 마구 베껴 써서 우리말까지 오염시키고 있으니, 요즘 대왕께서는 ‘나랏말싸미 미귁 말싸메 침략당하고 있도다’라고 탄식하고 계실 것 같다.

    한글날에 즈음해
    워싱턴에서
    조 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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