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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의 날라리가 뉴욕 월가에......

한봄김국빈 2014. 11. 8. 18:46

 

 

 

[여성조선]

유학생 3인의 이열치열 성공 스토리

  • 김가영 기자

     

    입력 : 2014.11.06 10:05 | 수정 : 2014.11.08 10:25

    현지에서 언어와 문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으려는 학생들이 많아진 요즘. 미국, 캐나다, 영국 등지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는 유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는 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게 사실. 아래 소개하는 3명의 주인공들은 수년의 유학생활 혹은 짧은 교환학생 기간 동안 인생의 절반을 바꾸었다. 한층 성장한 이들이 험난하고 치열했던 자신들의 유학 성공담을 전한다.

    ‘지방대 날라리’,  월스트리트에 취직하다 김희중

    
	[여성조선] 유학생 3인의 이열치열 성공 스토리

    희중 씨는 10년 전의 자신을 ‘지방대 날라리’로 기억한다. 실제로 지방의 한 대학교에 턱걸이로 입학한 그는 거의 모든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을 만큼 공부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대리출석은 기본, 학사경고가 옵션으로 따라오는 삶이었지만 그런 희중 씨의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 시발점은 군대였다.

    “내무반 동기 중 동현이라는 녀석이 있었어요. 군대 안에서 저는 작업, 운동, 사격, 훈련 등 모든 면이 동현이보다 월등했죠. 그런데 어느 날 한 선임이 동현이에게 역사에 대한 질문을 했어요.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녀석이라 그 방면에는 도사였죠. 평소 얕보았던 동현이가 눈빛이 달라지며 역사에 대해 줄줄 꿰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저 자신이 초라해지더군요. 처음으로 ‘나는 이제껏 살면서 뭐 하나에 저만큼 전문성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어요.”

    역사적 지식뿐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까지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던 동갑내기 동현 씨의 모습은 희중 씨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어요. 수업시간에는 맨 앞자리에 앉았고 전액장학금을 받기도 했죠. 부모님도 기뻐하셨지만 한편으론 혼란스러웠어요. 이제 막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는데, 학벌에 대한 차별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 학교를 아무리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봐야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미래에 대한 고민은 깊어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무렵, 지인이 배낭여행을 적극 추천하면서 희중 씨의 삶에 또 한 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희중 씨는 아르바이트로 마련한 돈을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1년에 걸친 여행을 통해 가장 많이 느낀 건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거의 미국인처럼 영어를 하는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거든요. 항상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며 대화하는 식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깊이 친해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고,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희중 씨는 아쉬웠던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어학연수를 계획했다. 대학생으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어학연수를 위해 떠난 게 스물네 살 겨울, 우리나라 나이로는 스물여섯에 간 거나 마찬가지예요. 사실 스물여섯이면 많이 늦은 거잖아요. 고민이 많았지만 딱 1년만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떠났어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 부속 어학원에 들어간 희중 씨는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며 영어 공부에 주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1년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차라리 미국에서 새로 학교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비용이 문제였지만 아주 답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 사립대학은 1년 학비만 4천만원 안팎이라 꿈도 꾸기 힘들어요. 근데 주립대학이나 시립대학은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하더라고요. 미국에서 유학생이 돈벌이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찾아보면 유학생들도 아르바이트할 기회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학비 마련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본격적으로 편입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여기저기 알아본 희중 씨는 결국 다니고 있는 어학원이 있는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로 편입하기로 결심했다. 영어시험과 토플 점수 등이 필요했고, 그때만 해도 더듬거리는 등 영어 실력이 상당히 형편없었던 희중 씨는 필사의 노력으로 편입에 성공했다.
    “미국에는 2년제 대학교를 일컫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 이하 CC)가 많아요.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전문대의 개념도 있지만, 미국 2년제 학교의 가장 큰 목적은 평균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학생들을 2년 동안 교육시켜 4년제 대학으로 편입시키는 거예요. 미국은 4년제가 워낙 비싸다 보니 저렴한 2년제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려고 하거든요.”

    그렇게 어렵사리 CC에 편입했지만 수업을 따라가기는 상당히 버거웠다. 그나마 천천히 발음해주는 노교수 덕분에 간신히 알아들었을 정도. 하지만 시간과 노력은 소통의 벽을 점차로 허물었다. 특히 에세이 수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저는 고등학교 수업시간 때 주로 자거나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어요. 고3 내내 읽은 추리소설, 판타지소설 양만 해도 어마어마할 거예요. 당시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유학 시절 에세이 수업 들으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보통 에세이 수업 들을 때 소재 고갈로 많이 힘들어하거든요? 물론 신문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으면 훨씬 좋겠지만, 제가 읽은 책들도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탄탄한 바탕이 되어주었죠.”

    ‘아이비리그’ 컬럼비아에 합격하다

    희중 씨가 CC만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왔다면 어쩌면 많고 많은 유학 사례 중 하나로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더 특별한 것은 소위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컬럼비아대학교에 기적적으로 합격했기 때문이다.

    “CC 졸업을 앞두고 4년제 대학교 편입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컬럼비아나 뉴욕대는 비싼 사립대이기도 했고, 원서를 넣어봤자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당시 저를 잘 알던 교수님이 가능성을 보셨는지 적극적으로 (컬럼비아에 원서를 넣으라고) 추천해주셨어요. 지금도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이만큼 해냈으니, 거기 가서도 충분히 잘 버틸 거라고요.”

    일반 시립대와 달리 원서 넣는 데만 70달러가 드는 사립 컬럼비아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그러고 몇 달 뒤, 합격 전화가 걸려왔다.

    “설마 했는데 정말 합격했더라고요.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어요. 한국 시간으로 새벽 6시였는데 바로 한국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죠. 물론 감동은 잠시, 현실적인 문제들이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어요. 내가 과연 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집에서 어렵사리 보내온 돈과 희중 씨 본인의 굳은 의지로 아이비리그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사실 자괴감이 많이 들었고 (회사에 다니는) 지금도 여전해요. 전 세계에서 똑똑한 친구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요. 미시경제학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학생의 80%가 저보다 훨씬 어린 백인 애들이더라고요. (평균적으로 백인 50%, 아시아계 30%, 흑인 10%, 그 외 10%의 인종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의 백인 애들은 머리도 좋지만 체력도 좋고 외모도 수려하잖아요. 제가 너무 못나 보이더라고요.(웃음) 처음엔 자격지심이 컸지만 조금씩 극복해나갔어요.”

    희중 씨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미국식 수업의 특징을 몇 가지 꼽았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 중의 일부는 그 수업방식이 자기와 맞지 않아서일 거예요. 제 생각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무조건 암기해야 하고 틀에 박힌 답만 요구하잖아요. 미국에서는 암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토론을 많이 하고 의견을 나눠요. 누가 틀린 얘기를 해도 수용을 할 수 있는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수업시간에 학생이 이상한 질문 하면 ‘쟤 뭐야?’ 이러잖아요. 미국에서는 틀려도 괜찮다고 들어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참여도가 높아지고 수업이 재밌어지죠.”

    현재 희중 씨는 일본 2위 증권회사 미즈호의 인턴을 거쳐 도이체방크 자산운용 부서에 정직원으로 입사했다. 세계 10위권 안에 포진한 독일 최대 규모의 은행 도이체방크는 그가 지난 수년 동안 흘린 땀방울의 결과다.

    “나이가 중요한 한국에서는 뒤늦게 무언가에 도전하기가 힘들어요. 늦깎이 대학생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기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고요. 근데 미국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이력서에는 경력만 쓸 뿐, 사진도 나이도 요구하지 않거든요. 편견 없이 사람을 뽑기 때문에 나이에 상관없이 열심히만 하면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어요. 그래서 더 큰 목표를 바라보며 이만큼 달려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를 취미로 나가곤 했던 스무 살 청년 희중 씨는 이제 매일 아침 월스트리트로 출근하는 번듯한 회사원이다. 더 큰물에서 놀고 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희중 씨의 자기발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꿈을 찾아 미국으로, 더 큰 꿈을 찾아 일본으로  조인정

    
	[여성조선] 유학생 3인의 이열치열 성공 스토리


    5년 전, 경기도 부천의 한 중학교 졸업을 앞둔 인정 양은 우연히 책 한 권을 읽었다. <쌍둥이 형제 하버드를 쏘다>(고2 때 미국 유학을 떠난 형제가 2년 반 만에 12개 아이비리그에 합격, 나란히 하버드에 들어간 일화를 담았다), 인정 양에게 처음 미국 유학의 꿈을 심어준 책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이 사람들을 꼭 만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날개에 적힌 쌍둥이 형제의 이메일 주소로 연락했죠. ‘일반고 입학을 앞둔 학생인데 미국 유학을 정말 가고 싶다.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나중에 이메일로 답장이 왔어요. ‘몇천 통의 편지를 받았지만 너만큼 간절하게 편지를 써 보낸 사람이 없었다’며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보통의 가정에서 나고 자란 인정 양에게 미국 유학은 그 단어만으로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재정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사립 유학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다.

    “그즈음 고등학교 학생들이 미국, 캐나다로 교환학생을 간 이야기를 담은 책을 봤어요. 대학생만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도 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미 국무부에서 주관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했죠.”

    국무부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비교적 저가에 갈 수 있고 안전한 편이지만 단점도 있다. 얼마나 괜찮은 (숙식을 제공하는) 호스트를 만나느냐 하는 것. 호스트들은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무료로 봉사하는 사람들이기에, 때로는 사람을 가려 받거나 불친절하기도 하단다.

    “호스트는 대부분 미국인들인데 주로 유럽인 게스트를 수용하길 원해요. 아시아 사람은 보수적이고 활발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 간 학교는 위스콘신 주의 이글 크리스천 아카데미였는데, 당시 저를 받아준 호스트 엄마가 청소 등 잡일을 너무 많이 시키고 (청소를 마친 뒤) 밤 9시가 되어 과제를 할라치면 불을 못 켜게 해 많이 힘들었어요.”

    학교 수업 따라가랴, 집에서는 눈치 보랴 쉽지 않은 나날이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정 양은 성장해갔다. 보다 독립적으로 나 자신을 챙기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갈 즈음, 보딩스쿨(기숙사를 갖춘 사립학교로 일반 사립학교보다 더 비싸다)이나 사립학교로의 전환을 준비했어요.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1년밖에 할 수가 없거든요. 비교적 저렴하다는 펜실베니아 주의 머시허스트 고등학교에 11학년으로 입학했고, 그때 정말 많이 공부했어요. 토플, SAT(수능), GPA(내신) 등을 챙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즌이었거든요.”

    결국 12학년을 마치고 인정 양은 미국의 신흥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리하이대학교에 합격했다. 하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학비 걱정이 앞섰다.

    “공립학교의 두 배 가까이 되는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그 무렵 부모님도 돌아오라고 하셨고요. 근데 저는 유학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공부가 잘됐고 저 스스로 발전하는 게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1학기만 다니고 휴학을 한 뒤 다른 길을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아시아학과에 입학한 인정 양은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공부, 걷고 싶은 진로가 뭔지 곰곰 생각해봤다. 그게 바로 아시아, 그중에서도 일본의 문화를 배우는 일이었다.
    “대학에 붙자마자 가고 싶은 나라가 일본이었어요. 언젠가는 일본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일본 대학을 찾아보았고 그중 하나인 와세다대에 지원하게 됐어요. 한국보다 학비가 1.5~2배 비싸지만 미국에 비하면 훨씬 낫거든요. 결국 와세다대 국제교양학부로 편입을 하게 됐어요.”

    지금 인정 양은 와세다대 1학년 신입생이다. 대학 생활을 묻자 한층 신이 난 목소리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일본으로 제 진로를 찾아간 인정 양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었다.

    “단기적인 목표는 일본어를 배우는 것, 장기적으로는 국제 기관이나 단체의 교육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요. 한·중·일의 각기 다른 교육 시스템이나 환경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요.”


    알래스카로 유학 간다고? 최지아

    
	[여성조선] 유학생 3인의 이열치열 성공 스토리

    충북 영동군에서 나고 자란 지아 양은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교 2학년 때 유학을 떠났다. 그때만 해도 부모님의 권유가 컸다.

    “고1 때 부모님이 처음 제안을 하셨어요. 사실 그때는 수능으로 대학 갈 생각만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갈 생각은 전혀 안 했거든요. 근데 영어 공부를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당장 대학도 중요하지만 삶에서 영어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하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미 국무부가 주최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한 지아 양은 학교와 호스트 가정을 배당받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받아주겠다는 호스트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가지 말아야 하나, 고민할 즈음 답변이 왔다. 근데 그곳이 알래스카란다.

    “처음에 알래스카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 어안이 벙벙했어요. 알래스카 자체가 교환학생이 잘 안 가는 곳이거든요. 게다가 호스트 배정 받고 바로 4일 뒤에 출국하라고 해서 알래스카가 어떤 곳인지 자세히 알아볼 틈도 없이 떠났어요.”

    두툼한 겨울 외투는 나중에 한국에서 추가로 부쳐주었을 만큼 급히 떠났다. 그렇게 도착한 알래스카에서 ‘뼛속까지 시리다’는 표현의 참뜻을 제대로 느끼고 돌아왔다고.
    “9월에 갔는데 며칠 지나니까 눈이 오더라고요. 눈이 오면 정강이 중간까지 기본으로 쌓여요. 추운 건 뼈가 시릴 정도로 춥고요. 초반에는 친구도 없어서 많이 외로웠어요. 다른 지역으로 교환학생을 간 친구들은 어떻게 지낸다더라, 얘기 들으면 ‘나도 쟤네처럼 잘 지낼 수 있는데 성격 탓도 영어 탓도 아닌 기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좌절만 할 수는 없는 일. 그녀는 좀 더 적극적인 학교생활로 춥고 서러운(?) 호스트 생활을 헤쳐나갔다.

    “과외활동으로 드라마 클럽에 나가 연극을 했어요. 미국은 공부 잘하는 애보다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활발한 학생을 더 좋아하거든요. 심지어 운동을 무척 싫어하는 제가 축구부까지 들어갔다니까요?”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는 ‘영어 좀 하네’ 소리를 들었지만 본토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가기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상태에서 수업에 들어갔어요. 근데 ‘이게 내가 아는 그 영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에서 배운 영어와 미국에서의 영어는 속도부터 발음까지 많이 다르더라고요. 처음엔 알아듣는 것조차 힘들었죠. 특히 과학 과목은 전문적인 용어가 많아서 더 힘들었어요. 역사가 생각 외로 재밌었고, 음악은 한국과 달리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시스템이라 정말 재밌게 들었어요.”

    한국에서도 음악을 좋아했던 지아 양에게 다양한 악기 연주의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의 수업방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에서는 ‘집중이수제(수업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특정 과목의 수업을 일정 기간에 몰아서 학습하는 방식)’라고 해서 (음악 수업을) 한 학년에 몰아넣잖아요. 음악 과목 안에 악보 보기, 노래 부르기, 오카리나 연주 등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들어가고요. 근데 미국은 기타면 기타, 오케스트라면 오케스트라 등 여러 과목으로 세분화되어 있어요. 음악도 국·영·수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과목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죠.”

    한편 지아 양은 교환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 중 하나인 역사를 가장 흥미로운 과목으로 꼽았다.

    “외국 학생이 다른 나라에 가면 가장 점수 받기 힘든 과목이 역사예요. 자기네 역사가 아니니까요. 특히 미국은 한국처럼 역사적 사실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발표하는 식의 수업을 많이 해요. 한번은 독일 애들과 한 팀이 되서 ‘분단’을 주제로 과제를 준비했어요. 처음엔 수행평가로 시작한 건데 하다 보니까 ‘이거 진짜 잘해야겠다!’ 하는 애국심이 들더라고요.”

    몇 달 전 한국에 돌아온 지아 양은 고3 수험생이라는 현실에 또다시 적응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미국에 머물면서 가장 부러웠던 교육시스템 한 가지를 꼽았다.
    “맨 처음 미국에 가서 가장 놀랐던 건,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이 서로 자기가 말하거나 대답하려고 손을 드는 모습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시켜도 안 하려고 하잖아요. 그와는 반대로 미국 학생들의 적극적인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어요. 선생님들도 어떤 대답이든 경청하고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요.”

    그곳 아이들에게 한국엔 ‘야자(야간자율학습)’가 있다고 설명해주었다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는 일화는 웃기기보다 씁쓸하다.

    “알래스카에서의 생활은 정말 힘들었지만 결국엔 저 혼자 극복하고 이겨냈어요. 한국에 있었다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거예요. 또래의 아이들이 겪지 못할 경험을 겪은 만큼, 이젠 무슨 일이 닥쳐도 ‘내가 못할 게 뭐 있어?’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당장은 고3이니 수능에 매진하고, 언젠가 국제기구에 들어가 국가 간의 관계 증진에 이바지하고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