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마당/▶건강생활

멍~때릴수록, 뇌는 쌩쌩해진다

한봄김국빈 2014. 11. 9. 10:33

 

조선닷컴에서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07/2014110702644.html?csmain

'멍 때리기' 우승한 9세 少女… 지나친 학습으로 뇌에 무리
"힘들 때면 저절로 멍해져" 무념무상 표정, 폭발적 호응

뇌가 쉴 때 생각도 정리돼… 뉴턴·아르키메데스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유인력의 법칙·부력 발견

지난달 27일 오후 12시,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 분홍색 요가 매트 45개가 일제히 깔렸다. 곧이어 매트 위에 45명이 차례로 정좌했다. 긴장한 표정의 50대 남성부터 새하얀 신부 드레스를 입은 20대 여성, 천진난만해 보이는 꼬마까지 도무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은 이들은 다음 순간, 초점이 풀린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벌건 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 모여 앉아 누가 더 멍한지를 겨루는 '제1회 멍 때리기 대회'(이하 멍 대회)였다. 1시간 30분 후 모두의 예상을 깬 우승자는 최연소로 참가한 김지명(9)양이었다. 수원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김양은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멍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1등 상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본뜬 (모조) 황금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대구에서 달려온 인디밴드 출신 20대, 춘천에서 올라온 남성을 제치고 영예의 1등을 차지한 김양을 지난 2일 만났다.
[Why] 멍~때릴수록, 뇌는 쌩쌩해진다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멍 때리기 대회’우승자인 김지명양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본뜬 트로피를 안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윤동진 기자
◇9세 꼬마가 압도적으로 멍한 비결은

김양은 결과 발표 직후 인터넷 스타가 됐다. 빨간 야구모자를 거꾸로 눌러 쓴 멍한 얼굴이 각종 SNS를 타고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아이의 귀여움 대신 모든 것을 내려놓아 버린 무념무상이 자리한 표정은 '멍한 게 자랑이냐'는 핀잔 대신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일반인의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일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반 고흐 전시회'를 관람하러 서울 나들이에 나선 김양은 "너무 힘들거나 지칠 때 저절로 멍해졌다"고 말했다. 김양을 힘들게 한 것은 학원이었다. 어머니 윤경(42)씨는 "정확한 개수를 밝히기 민망할 정도로 많은 학원을 보냈다"고 했다. 발레, 가야금 등 쉴 새 없이 학원에서 학원으로 오갔다. 윤씨는 "어느 날 영어 학원 선생님이 '지명이는 가끔 생각이 딴 세상에 가 있다'고 해서 아차 싶었다"며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쉬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니 과부하가 걸려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딸에게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던 윤씨는 직접 대회 참가 신청을 했다. 자칫하면 '멍한 아이'라고 굳어질 수 있는데 걱정은 안 됐을까.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걸요. 중요한 건 아이가 자신감을 갖는 것이고, 뭘 해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걸 알게 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1등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1시간 30분간 미동도 없이 '최선을 다해' 멍하게 앉아 있던 딸은 정말로 1등을 했다. 관람하던 시민의 투표 수와 심박수 측정 결과 등에 따른 평가 결과였다. 윤씨는 "대회 직후 학원 수를 대폭 줄여, 아이가 좋아하는 예체능 학원만 보낸다"고 말했다. '멍'은 잠이 아니라 쉼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한 김양이 자신만의 멍 때리는 비법을 살짝 공개했다. 먼저, 허리를 펴야 한다. 자칫하면 잠을 자게 된다. 다음 저 멀리 한곳을 응시한다. 단색 벽이 제일 좋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콧구멍이나 눈동자 등 신체 특정 부분에 집중한다. 지점을 정한 후 서서히 힘을 뺀다. 이후 허리에 힘을 주고 그대로 고정하면 과부하 걸렸던 뇌가 정리 작업을 시작한다.

◇서울시 공무원의 이름 딴 프로젝트

[Why] 멍~때릴수록, 뇌는 쌩쌩해진다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시작한 이번 대회는 30대 예술가인 웁쓰양과 저감독(두 사람 다 예명이다)의 퍼포먼스 작품이다. 스마트폰을 붙들고 살다 뇌가 피곤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멍해지는 모습을 돌아보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웁쓰양은 시청 앞을 장소로 잡은 것에 대해 "바쁜 월요일 정신없는 도시인들 사이에서 멍하게 앉은 시민을 대비시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따로 활동하는 두 사람은 이번 기획을 위해 '프로젝트 전기호'라는 임시 팀을 만들었다. 전기호는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실제 이름이다. 잔디밭 사용을 허가받기 위해 시청을 찾아간 웁쓰양은 "전형적인 공무원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사무적으로 철저하게 친절한 그에게 탄복해 아예 프로젝트 이름으로 쓰게 됐다"고 밝혔다. 멍 대회 이후 전기호씨는 시청 내에서 상당한 유명 인사가 됐다고 한다. 프로젝트 전기호는 내년 초 장소를 부산으로 옮겨 제2회 멍 때리기 대회를 열 예정이다.

◇아르키메데스·뉴턴도 멍 때려서 해냈다

멍 대회가 수백년 전 열렸다면 1등을 다툴 인물이 아르키메데스와 뉴턴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멍하다 부력의 원리를,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멍하다 만유인력에 착안했다. 뇌를 잠시 꺼두는 듯한 찰나에 떠오른 착상이 과학사를 바꾼 것이다. 인간의 뇌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1초당 10만 회의 화학적 상호 작용을 한다.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검색을 하다 보면 처리 가능한 화학적 한계치를 넘어선다. 그때부터는 뇌가 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비활성 상태인 기초값(default mode)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제까지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할 시간을 벌고, 새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휴지기라 할 수 있다.

멍 대회 자문을 한 황원준 한국정신건강연구소 원장은 "멍한 시간을 갖게 되면 과도한 집착이나 불필요한 생각들을 의식 속에서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동원 교수는 저서 '멍 때려라!'(2013)에서 "멍 때리는 시간이야말로 두뇌를 깨우고 명쾌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9세 꼬마 김지명양이 1등 상을 받으며 다시금 깨닫게 한 사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