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마당/▶예천향기

지보면 전설 설화

한봄김국빈 2016. 7. 4. 12:00


http://city.ycg.kr/ko/jibo/tour/legend/

 

지보면 (知保面)
구한말(舊韓末)까지는 용궁군의 11개면 중 내상, 내하, 신상면의 지역으로, 191441일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내하면(內下面)의 도경(道京), 익장(益庄), 지보(知保), 소동(所洞), 한여(閑餘), 마전(麻田), 석계(石溪), 원학(元鶴), 창동(倉洞), 매포(梅浦), 내포(內浦), 요성(腰城)

내상면의 율리(栗里), 신전(薪田), 갈동(葛洞), 어소(漁沼), 신류(新留), 만촌(晩村), 구태(九台), 방화(芳華), 오송(烏松), 외평(外坪), 고슬(鼓瑟), 수동(首洞), 서월(西月), 마산(馬山), 어화(漁化), 상월(上月)16개 동리와

신상면의 암천(岩川), 대죽(大竹), 신풍(新豊), 상리(上里), 직동(稷洞), 방학(放鶴), 구룡(九龍), 축동(杻洞), 화량(化良), 삼송(三松), 도마(道馬), 부항(缶項)의 동리와

구읍면의 용포동 일부,

비안군 현내면의 반룡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보역(知保驛)의 이름을 따서 지보면(知保面)이라 하여 예천군에 편입되어 암천, 대죽, 신풍, 도화, 지보, 소화, 마전, 매창, 어신, 만화, 송평, 수월, 마산, 상월의 15개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안동시 풍천면, 남쪽은 풍양면과 의성군 신평면, 서쪽은 용궁면, 북쪽은 개포면과 인접해 있다.
가볼 만한 곳은 익장문화유적마을이 있으며, 특산물은 예천참깨와 참기름, 마늘, 풋고추, 양파, 참우 등이 있다.

 

까막수리, 까막솔(烏山)
위치: 지보면 어신2(까막솔)
이 마을 뒷산이 까마귀 혈()이고 앞산은 나즈막한 언덕으로 송장혈이다.
뒷산의 소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가 앞산의 죽은 산을 보고 시끄럽게 우는 곳이라 하여 까막수리, 까막솔 또는 오산(烏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옛날 어느 해 큰 홍수로 사람과 가축이 모두 휩쓸려 죽고, 다만, 까마귀 떼만이 마을 터를 뒤덮고 슬피 울어서 까마귀가 슬피 운 곳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또 영남의 남쪽 선비들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서울나들이를 거쳐 과거(科擧) 보러 가는 길목의 주막거리였는데, 이 곳 주막에서 선비들이 쉬고 갈 때 주모들이 이들을 새선비라고 불렀다. 그래서 선비가 머물러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풍류객(風流客), 어느 선비는 신관(新官) 사또가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신류(新留)라고도 했다 한다.
또한 공술 먹고 환대(歡待)받고 갈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지방(地方)에서는 까닭 없이 술값을 물게 되거나 금전(金錢)의 손해(損害)를 보게 될 때 그 사람을 오산(誤算)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옻샘
위치: 지보면 도화2(삼송마을 덕주산)
지보면 도화2리 삼송마을 서편 덕주산에 옻샘이 있다.
옻샘물은 78년 전만 해도 옻이 오른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다고 한다. 이 샘물은 약() 효험(效驗)이 좋아 객지 사람들도 많이 찾아 왔는데 약 효험을 보자면 이 샘물을 잘 알고 샘을 위해 애쓰는 안동댁(安東宅)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꼭 듣고 가야한다고 한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안동 풍산(豊山)에 사는 분이 아침에 비린 냄새나는 음식을 먹고 찾아와서는 할머니를 찾아보지도 않고 샘을 급히 찾아갔다가 큰 구렁이를 보고 놀라 집으로 돌아가서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묘(鄭墓)에 얽힌 지관(地官)의 기지(奇智)
위치: 지보면 도장리
지보면 도장리에 있는 정사(鄭賜)의 묏자리를 우리나라 8대 명당(明堂-좋은 묏자리)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수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 묏자리를 얻기 위한 박씨(朴氏)의 성을 가진 지관(집터,묘터를 잡는 사람)의 뛰어난 기지(奇智)에 대하여 감탄(感歎)을 금치 못하는 전설이 있다.
정사(鄭賜: 14001453)는 진주목사(晋州牧使)일 때 임지(任地)에서 죽었다. 목사라는 벼슬 높은 사람의 장사일 뿐더러, 당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젖어 있던 사회 풍조로 보아 상주(喪主)들이 응당 자기 아버지의 묘터를 명당(明堂)에 쓰려고 하였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명당자리를 찾기 위하여 시신(屍身), 상주, 호상꾼, 풍수(風水), 상여꾼들을 태운 10여 척의 배가 진주 남강(南江)에서부터 낙동강(洛東江)으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당대의 명지관(名地官)인 박 풍수(朴風水)를 앞세워 산세(山勢)와 지세(地勢)를 살펴가면서 몇 달 만에 마침내 이 곳 도장마을 앞까지 배가 왔을 때 배 선두에 앉아서 동북편 산천(山川)의 지리(地理)를 살피고 있던 박풍수가 !” 하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서면서 배를 멈추라고 사공에게 고함을 쳤다. 선두(先頭)에 선 배는 급히 멈추어지고 박 풍수가 가르쳐 준 강 건너 동북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다. “한발 늦어 그만 놓쳤구나!” 말없이 서서 이윽고 한 곳만 바라보다가 무겁게 떨어지는 박 풍수의 비통(悲痛)에 가까운 탄성이었다.
바라보이는 저곳이 천하(天下) 명당(明堂)인데 현재 다른 사람이 뫼를 쓰고 있다.”는 박 풍수의 말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현장에 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상주(喪主)들이 우겨서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묘 터를 닦으려하니 물이 쏟아져서 묘를 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서 철수하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돌아서는 상주에게 우리가 이 자리에 묘를 들여도 좋습니까?” 물으니 우리가 쓰지 못하는 자리에 들이던지 말든지!” 라는 무뚝뚝한 대답을 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물어서 묘를 써도 좋다는 확답을 듣고 난 박 풍수는 조용히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광중(壙中)에 고여 있는 물위에 겨(벼껍질) 한 섬을 갖다 풀고, 대젓가락 세 매를 물속에 집어넣으라고 시키고, 인부 세 사람을 호미 한 개씩을 가지고 자기를 따라 오라면서 현장(現場)에서 멀리 떨어진 도마라는 마을 논두렁 밑에 가서 호미로 논두렁 밑을 파라고 하였다. 세 사람의 인부는 박 풍수의 지시대로 각각 세 곳의 논두렁 밑을 호미로 긁적이니, 갑자기 겨가 섞인 물이 꽐꽐 쏟아지기 시작하며 대젓가락 한 매씩이 물에 딸려 나오더니 세 곳이 모두가 샘이 되어버렸다.

묘를 쓰려고 하는 현장의 물은 이 세 곳으로 빠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 이 묫자리에 물이 고였을 때 금붕어가 놀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겨와 놋젓가락이 나왔다고 하는 샘들은 현재 도마동네 사람들의 식수(食水)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수량(水量)이 한결 같고, 수정(水晶)처럼 물이 맑고 맛이 좋다고 하며, 지금 이 세 개의 샘 이름이 도마샘” “어룽샘” “옥로정”(玉露井)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명당(明堂) 터를 잡은 사람은 박씨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 이름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정사(鄭賜)
정사(鄭賜 : 14001453)는 본관이 동래(東萊), 귀령(龜齡)의 셋째아들이다.

1420(세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고 이조좌랑, 예조, 형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정성을 다하였다.

문학과 덕행(德行)이 뛰어났고 지조와 절개가 높아 완담사(浣潭祠)에 모셔졌으며 웅천(熊川)고을 동헌(東軒)에서 읊은 시가 전해온다.

겹겹이 두른 뫼뿌리는 삼면을 에워싸고(千層列峀圍三面), 넓고 넓은 물결은 끝간데를 모를로고(萬頃波濤浩一邊)지보면 도장리 명산에 있는 정묘”(鄭墓)가 그의 묘소이다.

1476(성종 7)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으로 내산군(萊山君)에 봉군(封君)되고, 중종 11(1516)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다시 증직되었고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노처녀(老處女)와 월탄(月灘)
위치: 지보면 도장리
옛날 지보면의 구마전과 도장리 해평 사이에 석씨(昔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언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석씨의 딸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집을 못간 노처녀(老處女)가 되었다.

()을 고치려고 날마다 익모초를 다려 먹던 중 어느덧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저녁 집 곁에 샘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서 샘에 가보니 달이 샘물에 둥둥 떠올라 넘쳤다.

그것을 본 노처녀는 기이(奇異)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부터 몸이 이상하여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노처녀는 날마다 근심하는 도중 어느덧 열 달 만에 아이를 낳았다.
그것을 본 부모(父母)는 깜짝 놀랐다.

부모라도 자식이 나이가 많아서 나무랄 수도 없고. 바른 대로 말하라고 하여도 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부모가 말하기를 정녕 너 혼자서 아이가 생겼다면 증거를 보이라고 하면서 네 손으로 아이를 솥에다가 삶아라.” 하니 노처녀는 부모의 영()을 어기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면서 아이를 솥에다 삶았다.

한참 후에 솥뚜껑을 열어보니, 아이는 간 곳 없고 새파란 익모초만이 한 솥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부모는 기가 막혀 딸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달래었지만 만사가 허사로 돌아갔다.
노처녀는 원통해서 날마다 뒷산에 올라가 슬피 우는데 웬 용마(龍馬)가 옆에 와서 끓어 앉더니 같이 울었다.

그래서 그 골을 애곡(哀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용마(龍馬)는 며칠 울더니 그 주위를 빙빙 돌다가 샘에 가서 빠져 죽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무덤을 크게 지어 주었는데 지금은 이 무덤을 말무덤이라고 부르고 있다. 샘에서 달이 둥둥 떠올라 넘쳤다고 해서 월탄이라고도 부른다.

월탄(月灘)에 대해서는 월태이라고도 하며 지보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의 지형으로 조집묘산형국(朝集墓山形局)이다. 개인이 살기에는 터가 드세고 큰 인재가 날 자리라고 옛날부터 전해왔는데 1790년대 월탄동자(月灘童子)라는 신동(神童)이 태어났다.
본명은 안필성(安必成)으로, 낙파 안근(洛坡 安)의 아들, 글을 배우지도 않고 글을 지어 금행동자(金杏童子)와 병칭되었으며, 열 살에 문학(文學)이 대성해서 많은 일화와 명작을 남겼으나 12살에 아깝게 요절(夭折)하였다 한다.

작품으로는 월탄기(月灘記: 지보면 월탄초등학교 근처의 경치를 읊은 글), 성학도잠(聖學圖箴), 월탄십이경시(月灘十二景詩) 등이 남아 있다.

 

갱장골
위치: 지보면 매창2(매화촌 뒷산)
지보면 매창2리 매화촌 뒷산 이름이 나부산이다. 그 산 모양이 마치 용이 낙동강에서 놀다가 언덕에 나와서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 같다고 한다.
그리고 용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약수가 나왔다고 하며, 용의 입안에서 나는 물을 마시니 물은 효험이 좋아서 지팡이를 짚고 온 환자(患者)가 이 약수(藥水)를 먹으면 병이 나아 가지고 짚고 온 지팡이를 나뭇가지에 그냥 걸어놓고 갔다고 해서 그 골 이름을 쾌장(快杖)또는 갱장골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건너편에 절이 있었는데 절 주지가 가만히 보니 절에 불공(佛供)을 드리러 오는 사람은 없고 약수터에만 사람들이 몰려드니 심술이 나서 약수터 관리를 소홀히 하여 약수터가 없어지고, 또한 얼마가지 않아 절도 망하였다 한다.

지금은 주춧돌과 기와 조각만이 남아 있는데 <용궁읍지>에는 용곡사(龍谷寺)라고 하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실렸다.
또한 어떤 설에 의하면, 이 약수는 먼 곳에서 오는 환자는 병이 잘 낫고, 가까운 곳에서 오는 환자는 별로 효험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멀리서 오는 환자들이 마을 한복판으로 많이 다니니 마을사람들의 피해가 많아져서 그 약수터를 소홀히 관리하였으며, 일하는 농부들이 약수터를 식수 등으로 쓰다가 약 200년 전쯤에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약수터가 있는 주변에는 용()과 얽힌 지명(地名)이 많은데 마산리의 용포동(龍浦洞)을 비롯하여 용샘, 용소, 쌍룡골, 용궁면의 회룡, 비룡산, 의성군 다인면의 용곡 등이 있다. 이 용의 형상을 보자면 매창2리 뒷산의 나부산에서 살펴보면 잘 나타나는데, 용의 머리는 풍양면 쪽이고 용의 꼬리는 마산리의 용포동 뒷산이 되며 용의 등은 현재의 나부산이라 한다.
지금도 팔도지리(八道地理) 풍수가(風水家)가 이곳을 많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풍지교(豊知橋)의 문정자(文亭子)
위치: 지보면 마전리
지보면과 풍양면 그리고 의성군 다인면 경계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풍양과 통하는 풍지교(豊知橋)와 의성군 다인면과 통하는 지인교(知仁橋)가 건설되어 교통(交通)이 편리한 곳이지만, 옛날에는 배로 왕래하느라고 불편이 많았다.
옛날에는 여기가 소금배 선착장이어서 사람이 많이 모였던 곳이다.

서편 강변에는 문씨(文氏) ()을 가진 부자(富子)가 살았는데, 그 부자가 정자(亭子)를 지어 정자마루 헌함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풍류(風流)를 즐기곤 하였다.

이 정자에 선비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는데 점차 건달, 잡객들이 많이 모이면서부터는 술집으로 변하여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돈벌이가 되면서 술과 음식을 배로 나르자니 불편하고 홍수(洪水)가 날 때는 영업을 하지 못했다.

문씨는 꾀를 내어 정자마루 끝과 강 건너 자택에다 큰 물레를 장치하고는 밧줄로 연결시켜서 술두루미(목과 아가리는 좁고 길며, 배는 단지처럼 둥글게 부른 모양의 큰 병)와 고기를 매달아 놓고 힘이 센 두 사나이로 하여금 물레를 돌리게 하여 술과 음식을 날랐다.

이 정자 이름이 문씨네 정자 또는 물레를 사용하면서 물레정자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문씨네 선산에 타성 김씨(金氏)가 장사를 지내려고 하자, 문씨가 이를 막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문씨가 생각하기를 살을 깎고 뼈를 깎더라도 묘를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작정하고는 장지(葬地)에 문상을 가서 상주에게 가서, “그냥 올 수가 없어서 탁주 한 병을 가져왔으니 한 잔 드시지요하면서 시퍼런 칼로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칼끝에 꽂아 상주(喪主)에게 안주로 주니 상주가 서슴없이 받아먹었다.

문씨 생각에는 상주가 겁에 질려 묘를 안 쓰고 물러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주가 널름 받아먹으면서, “술을 받아먹었으니 나도 그냥 있을 수 없소.

내 술도 한 잔 받으시오.” 하더니 역시 다리를 베어 주는데 문씨는 그 안주를 먹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얼마가지 않아 문씨의 재산은 바닥이 나고 문씨는 어디로 떠났으며 정자도 사라지고 지금은 문정자(文亭子)”란 이름만이 남아 있다.

 

너리실의 주먹바위
위치: 지보면 암천리 너리실
암천리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너리바우 또는 너리실이라는 곳이 있다.
예천(醴泉) 임씨(林氏)가 많이 사는 마을이며 마을 앞 개울 바닥이 아주 넓은 바위로 뒤덮여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너리바우라고 한다. 그 중에 바위 형상이 주먹 모양을 하고 있어 주먹 바위로 불려지는 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들은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터 및 농부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무덤(言塚)
위치: 지보면 대죽리
지보면 대죽리에는 말무덤이라는 곳이 있다.
옛부터 이 마을에는 각성바지들이 살고 있었으나 문중간(門中間)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등 말썽이 잦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原因)과 처방(處方)을 찾기에 골몰했다.

한편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野山)이 있는데, 그 형세가 마치 개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개 주둥이 형상이어서 주둥개산이라 불렀다.

어느 날 한 과객(過客)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를 보고 좌청룡(左靑龍)은 곧게 뻗어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右白虎)는 구부러져 길게 뻗어 위턱의 형세(形勢)이어서 개가 짖어대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이 시끄럽다고 하면서 예방책(豫防策)을 일러주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과객의 말에 따라 개 주둥이의 송곳니 위치쯤 되는 동구(洞口)밖 논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바위 세 개를 세우고, 개의 앞니 위치쯤 되는 마을길 입구에는 바위 두 개로 개가 짖지 못하도록 소위 재갈바위를 세웠으며, 마을 사람들은 항상 싸움의 발단이 되어온 마을의 말썽 많은 말()들을 사발에 담아 주둥개산에 묻어 말무덤(言塚)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처방이 있은 이후부터는 이 마을에는 싸움이 없어지고 평온해져 지금까지 이웃간의 두터운 정이 계속되고 있다.
말싸움이 없어진 이후 주둥개산에 말무덤이라고 새겨진 비()를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옥녀봉(玉女峰)과 장군바위(將軍巖)
위치: 지보면 만화2(만촌리)
먼 옛날 지보면 만화2리 만촌리에는 옥녀봉과 장군바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옥녀봉(玉女峰)은 만촌 마을의 앞산으로, 노적봉이라고도 한다.

또한 들어다 놓은 듯하다고 해서 들봉산이라고도 한다.

먼 옛날 천신(天神)께서 세상을 구경하다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북쪽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고 갸륵하게 보여서 노파에게 물으니, “자손이 없어서 아들이든 딸이든 후손하나 얻고자 매일 이렇게 기도를 드린다.”고 하니 천신(天神)은 그 지극한 마음에 감동하여 그러면 내일 이 곳에 다시 와 봐라하시면서 사라졌다.
다음날 노파가 그 자리에 가 보니 수려한 처녀의 댕기머리 한 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생겼는데, 이를 옥녀봉이라 하였다.

노파는 그 옥녀봉에 기도를 하던 중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제 그 천신이 다시 나타나, “그대의 정성이 하도 지극하여 이 옥녀봉을 내리니 옥녀봉에 천일기도(千日祈禱)를 올리면 나라를 잘 다스릴 장군을 보내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날 이후 노파는 천일을 정성들여 기도하였으며 천일기도가 끝나던 날 노파는 잠결에 애기 울음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옥녀봉 꼭대기에 용모가 수려한 옥동자(玉童子)가 있는지라 집으로 데려와 애지중지 길렀다.

아기는 자라면서 재주와 지혜가 매우 뛰어나 이웃에선 아기장군이라 하였다.

이웃에서는 이 신동(神童)을 보려고 하자 아기 장군은, “나의 모습은 마음 착한 사람에게는 보이나 마음이 나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으니 발자국 소리를 들어 보라하면서 바위 위를 걸어가는데 아기장군은 보이지 않고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기운차게 걸어가니 바위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기장군을 보기 위해 매일같이 고운 마음으로 옥녀봉에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아기장군 발자국이 있는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며 자식을 얻고자 원하는 사람이나, 자식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원하는 사람은 옥녀봉에다 아이를 팔고는 치성을 올린다고 한다.
또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흡사 큰 발자국 모양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데 보통 사람의 발 크기의 2배가 넘으며,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恭愍王)이 안동(安東)에서 상주로 피난(避難) 했는데 그 임금을 따라온 이방실(李芳實)장군이 이 바위에서 쉬어 간 뒤 바위 이름을 장군 바위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구룡동(九龍洞)
위치: 지보면 신풍2리 구룡
지보면 신풍2리에 구룡동(九龍洞)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용모(容貌)가 비범하고 골격(骨格)이 준수(俊秀)하며 7일만에 말을 하고 다락에도 오르내릴 정도가 되자, 주위에서는 이 마을에 장수(將帥)가 났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힘센 장수가 나면 역적(逆賊)으로 모함을 받아 가문(家門)이 멸문(滅門) ()를 입는다고 두려워하여 집안에서 챗돌로 눌러서 7일만에 죽게 했다고 한다.

이 때 마을 앞 중래산(重崍山)에서는 용마(龍馬)9일이나 슬피 울다가 사라졌고 마을의 식수인 샘물이 핏빛이 되었다.

때마침 시주 나온 스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가르침을 구했더니 이 우물은 장군수(將軍水)”이므로 장수가 먹어야 되는데, 장수(將帥)가 못 먹게 되니 우물도 그 일을 슬퍼하여 빛깔이 변했으니 식수(食水)로는 쓸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스님에게 새로운 삶터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니, 지금의 이 곳 마을 터를 잡아 주고는 죽은 어린 장수와 용마(龍馬)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구룡동(九龍洞)이라는 마을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풍수설)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구룡쟁주(九龍爭珠) 명당이 있어서 구룡동이 되었다고 한다.

 

내성군(萊城君)을 모신 부조묘(不跳廟)
위치: 지보면 도장리
부조묘(不跳廟)는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과 운명을 같이 하고 만인의총(萬人義塚)의 고혼(孤魂)이 된 내성군(萊城君) 정기원을 모신 불천위(不遷位) 사당으로 매년 추석에 제향을 치른다.
정기원(鄭期遠: 15591597)은 본관이 동래(東萊)로 상신(象信)의 아들이며,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내성군(萊城君)에 봉작되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는 1582(선조 15)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고 1585(선조 18) 식년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 안악(安岳)현감, 승정원 우부승지를 거쳐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 나던 해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남원성(南原城)을 끝까지 사수하다 산화하여 1604(선조 37) 문신(文臣)으로서 유일하게 선무공신 3등 첫째로 삼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모셨다.

 

개무덤(狗塚)
위치 : 지보면 마산리 어화실
옛날 동래 정씨 문중(東萊 鄭氏門中)의 어느 분이 아내와 아들 둘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흉년(凶年)이 들어 먹을 양식마저 떨어져 버렸다.

그래서 정씨는 가족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우리 한양(漢陽)으로 가서 먹고 살 궁리를 해 보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씨 가족은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서울에 가서도 일거리가 없자 낮으로는 구걸(求乞) 생활로 연명했으며, 밤에는 짚신을 만들어 팔아서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살아갔다.

세월이 흘러 간신히 구걸신세를 벗어나게 된 어느 날, 한 짐의 짚신이 모두 팔려서 정씨는 기분이 좋아 개다리를 하나 사서 귀가(歸家)하였다.
온 신구들이 좋아하면서 그 개다리를 삶기 시작했다.

개다리가 다 삶아 갈 무렵, 어디에서 왔는지 도깨비 세 마리가 나타났다.

서발 장대만한 도깨비들이었다.

도깨비들이 말하기를, “어서 개다리를 내 놓으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겁이 나고 해서 아깝지만 얼른 주고 말았다.

맛있게 먹은 도깨비들은, “고맙다. 그렇지만 모월 모일(某月某日)에 이곳에 또 올 테니, 그 때 개 한 마리를 다시 삶아 놓으시오.”라고 하였다.
두려움에 떨던 정씨는 도깨비가 다시 온다는 그 날까지 짚신을 열심히 만들어 팔아 중개 한 마리를 사서 삶아놓으니, 수많은 도깨비들이 들이닥쳤다.

모두들 맛있게 먹고는 이르기를, “모월 모일 어화실로 오시오.”라고 하면서 사라졌다.
정씨 가족은 약속한 날 어화실로 내려왔다. 어화실 뒷산에 있는 선조(先祖)의 묘소를 찾아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묘를 옮겨갔다.

이상히 생각하며, 마을로 내려오던 정씨는 이씨(李氏)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호령하고 있는 도깨비들의 소리가 들렸다.
도깨비들은 이씨 집안은 어서 빨리 마을을 떠나지 못할까?”라고 호령하였다. 이씨들은 겁에 질려 이 마을에서 모두 떠나자, 정씨는 옛날. 자기가 살던 옛집으로 찾아갔다.

집에 들어가니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고양이는 밥도 먹지 않다가 사흘 째 되던 날, 슬그머니 집을 나가 버렸다.
세월이 흐른 후 정씨는 큰 개 두 마리를 사서 키우고, 그의 아들들은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고양이가 떠난지 20년 되던 해의 정씨 생일에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나타났다. 마당에서 개 두 마리와 고양이가 싸우기 시작했다.
싸우기를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되던 날, 개 한 마리가 죽고, 어두워 질 무렵 고양이도 죽어 개 한 마리만 남았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개 한 마리를 곱게 길렀으나 그로부터 몇 년 못가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정씨는 개의 무덤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만약, 그때 개가 없었다면 정씨 집안은 모두 망했을지도 모른다.

 

마장군(馬將軍)
위치: 지보면 지보리
마장군은 일명 마도치라고 한다.

1890년 초에 지보면 지보리에 나타났던 화적집단(火賊集團)의 두목이다.

그는 잘 생긴 미남자로 장날을 이용하여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오는 그는 항상 분다 분다 바람이 분다 만고강산(萬古江山)에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를 부른다.
당시는 개화기(開花期)로 시대의 변천(變遷)과 외세(外勢)의 침략에 따른 급박한 사회 정세를 풍자(諷刺)하였다. 마도치의 복장은 일치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도포에 갓을 쓴 선비의 복장이었고, 어떤 때는 군복(軍服)을 입은 군인의 복장이었고, 또 어떤 때는 일반 상민(常民)의 복장을 하기도 했다.
활동지역은 용궁현(龍宮縣)을 중심으로 의성군, 상주군, 안동부(安東府), 비안현(比安縣), 다인현(多仁縣)에 걸치는 지역이다.
특히, 용궁현과 다인현의 접경(接境)인 비룡산(飛龍山)을 중심으로 동서남으로 뻗은 일월산맥(日月山脈) 일대, 의성 비안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더욱이 다인현 광덕(廣德)에는 당시 금광(金鑛)이 있어 금광의 노동자나 주변 지역의 몰락(沒落) 농민을 규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약탈(掠奪) 대상은 양반 부호, 금광, 시장 등에 대한 약탈은 말할 것도 없고, 낙동강(洛東江)을 내왕(來往)하는 소금배와 연계된 내륙사업 지역에도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마도치의 활동은 매우 위협적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무관(武官)으로 이름을 떨치던 김선달(金先達)을 다인현에 파견하였다.

그는 무술에 능한 날렵한 인물이었다. 마도치를 포획하기 위하여 대지주(大地主)인 참봉 이필언(參奉 李弼彦)을 찾아가 그의 협조를 구하였다.
지보촌(知保村)에 장()이 서던 어느 날, 마도치는 진도(津渡)나루를 건너고 있었다. 이 때 뒤따르던 김선달은 마도치가 타고 있는 배가 강 중간까지 마도치를 향해 소리쳤다.

사공(沙工), 사공! 배를 돌리시오. 지금 이 곳에는 죽어가는 아이가 있소. 빨리 의원(醫院)에게 보이지 않으면 생명을 건질 수 없소.” 마도치도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배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선달은 거적을 뭉쳐 아이로 위장하고 배에 올라탔다.
마도치는 그것도 모르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배가 강 중간에 이르자 갑자기 김선달이 마도치를 메어치고 포박(捕縛)했다.

포박된 마도치는 지보촌 장터에서 처형(處刑)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난 날 마도치에게 크게 피해를 입은 안동 권씨문중(安東 權氏門中)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맡겼지만 이들은 죽이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마도치 일당(一黨)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언제 이들에게 어떤 보복(報復)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처형은 시장(市場)에 모인 군중(群衆)에게 맡겨졌다. 시장 앞 백사장에 큰 구덩이를 파고 여러 사람이 마도치를 생매장하였다.
이 때 갑자기 모래바람이 일어나고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예천문화 5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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