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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서<11>말무덤 한대마을[대죽리] 풍수의 정반합

한봄김국빈 2018. 9. 17. 12:38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

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서<11>말무덤 한대마을[대죽리] 풍수의 정반합

 

 

http://m.ycinews.co.kr/view.asp?intNum=61323&ASection=001002

 

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을 찾아서

 

<11>말무덤 한대마을 풍수의 정반합

 

풍수는 분명 진리의 영역이 있다. 그러나 그 세계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의 풍수 연구자들이 땅 자체를 보고 뭔가를 깨달으려 하지 않고 예부터 전해오는 지리학설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전통풍수론에서는 진리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땅을 물화(物貨)로 보는 서양식 토지관과 대조되는, 물활론적인 땅을 상정하는 동양식 토지관만 존재할 뿐이다.

 

절대적 진리도 아닌 그런 상대적 토지관 수준의 알량한 풍수 지식을 가지고 제멋대로 땅을 평가하고 폄훼하는 이가 요즘도 적지 않다. 그것은 실거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환경심리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테러와 같은 행위다.

 

 

▲ 한대마을 일대 위성사진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대죽리의 옛 이름]에 우주에서 하나뿐인 말무덤[言塚]’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 무덤, [] 무덤, [] 무덤, 시총(詩塚:시 무덤), 의총(衣塚:옷 무덤), 발총(髮塚:머리털 무덤) 같은 무덤 얘기는 들어본 적 있지만 사람의 말[]을 묻은 말무덤은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꽤 있을 법하다.

 

 

▲ 말무덤 안내판

 

 

말은 풍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말은 파동이요, 파동은 기이며, 기는 풍수이기 때문에 말은 곧 풍수다.  말 풍수의 참 진리 세계는 깨달은 이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이 글이 일반인을 위한 글임을 감안해 여기에서는 팩트에 입각한 말무덤 얘기만 논하기로 한다. ‘ 자체의 기 풍수를 살펴보는 것이 아닌 말무덤이라는 유적 경관(景觀)의 생성 배경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같은 것을 한 번 알아보자는 말이다.

 

 

▲ 말무덤으로 올라가는 길

 

 

조선 십명지(十名地) 중의 한 곳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대죽리는,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 그대로 얼풍수의 하찮은 막말 때문에 개 주둥이 터로 전락한 안타까운 삶터다. 인터넷 검색창에 말무덤을 입력하면 온통 개 주둥이 개의 입에 물린 재갈 같은 얘기들뿐이다. 이 또한 정보화시대의 일종의 환경심리적 사이버 테러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고유의 한반도 호랑이 형상을 희생물을 상징하는 토끼 형국으로 비하하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을 꾀했던 악랄한 술책과 하등 다르지 않다.

 

 

▲ 말무덤 공원

 

 

지난 밤 천둥 번개와 폭우가 쏟아지고 다음날 아침 일찍 밝은 햇살 아래 필자와 조우한 대죽리 마을 터는 옛 모습 그대로 땅 기운이 생생했다. 필자가 이 나라 안에서 언제든지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명당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칠팔십대의 마을 촌로들은 말무덤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터가 개 주둥이 터로 전락한 데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그 순간 헤겔의 변증법인 정반합(正反合) 논리가 문득 필자의 뇌리를 스쳤다. 한때 조선의 명형국지로 위세당당했던 정()의 강촌(江村)마을이 말무덤이 만들어지는 ()’의 단계로 돌아선 후 수백 년 동안 거기에서 멈춰 새로운 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대죽리 마을 터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과 주민들의 떨어진 사기(士氣) 회복이 절실해 보였다.

 

 

▲ 정반합 원리도

 

 

세상은 정립(定立)-반정립(反定立)-종합(綜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 ‘부정의 부정 과정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한다. 어느 한 과정에서 멈추면 안 된다. 새로운 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이 된 후, 또 그에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제기돼야 한다. 사람도, 학문도, 공간도, 장소도 다 그렇게 발전한다. 이 글이 대죽리 명기성(明氣性)의 역사적 변천과 그 실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의 글인 동시에 ()의 글이 되기를 기대하며, 하루 속히 이에 대한 또 다른 발전적인 ()의 글이 제시되기를 소망한다.

 

(): 조선 십명지(十名地) 옥대형 한대(閒大)마을

세종실록지리지 한대(閒大)’라는 지명이 나온다. 지금의 대죽리와 신풍리를 합쳐 부른 마을 이름이었다. 효종 때 파평 윤씨가 아랫한대에 세거하면서 신풍리(新豊里)로 개명해 독립해 나가고, 남아 있던 웃한대는 대죽리(大竹里)가 되었다.

 

 

▲ 한대마을(대죽리) 지형도

 

 

한대마을은 조선 십명지 중의 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비봉형(飛鳳形) 명당설과 풍취나대형(風吹羅帶形) 명당설이 그 당시 한대마을 터의 정체성(正體性)을 규정한 2대 명당설이었다. 행정적으로 분리돼 나간 신풍리는 후일 와우형(臥牛形) 길지라는 독자적인 명당설을 구축했다.

 

 

▲ 대죽리 마을에서 밖을 내다 본 전경

 

 

한대마을은 신라 때부터 사람이 모여 살며 마을을 형성했으며, 마을 앞쪽으로 낙동강이 장유수(長流水)를 이루며 흐르고 마을 뒤편에는 봉두령(鳳逗嶺)이 우뚝 솟아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었다. 다만 큰물이 질 때면 하천 유수의 공격[침식]사면 쪽에 놓여 있던 마을 앞 웃개들[上浦野]과 아랫개들[下浦野]이 물에 잠기는 폐단이 있었을 뿐, 지명 그대로 한가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강촌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한대라는 한자 지명의 한글 어의(語義)가 순 우리말인 ’ ‘  대나무’ ‘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마을 촌로들은 지금도 한대의 뜻을 그저 큰 대나무[대죽]’ 쯤으로 받아들일 뿐 한가하고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한자어 한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을 뒤를 받쳐주고 있는 종산(宗山)격인 봉두령과의 풍수적 연관성 때문인 듯하다. 봉두령은 봉황이 머문다는 뜻을 지닌 최상격의 명산을 상징한다. 봉황의 먹이는 대나무 열매다. 현재도 마을 곳곳에 대나무숲이 남아있지만 마을 이름을 대죽리로 비보(裨補:보완)해 줌으로써 비봉형 명당터[鳳凰之地]로서의 위상을 좀더 확실하게 갖추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봉황 터의 핵심부에 자리한 대죽리 마을의 주산(主山) 이름은 원방산(圓方山)이다.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지세가 원형에 가까워 그렇게 명명했을 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줄여서 원방이라 했을 성싶다.

 

 

그것은 곧 원방산이 천지산과 같은 뜻의 땅이름이며, 또한 천지는 음양이요 음양은 태극이니 원방산이 만물의 시원이 되는 태극산과도 의미 상통하는 명산이라는 것을 뜻한다. 크기에 비해 그 함축된 상징성이 그토록 원대한 산은 아마 이 땅 안에서 원방산이 유일할 것이다.

 

 

 풍취나대형 명당 예시도

 

 

대죽리의 또 다른 명기설(明基說) 풍취나대형은 마을을 둘러싼 둥근 산세를 바람에 날리는 비단 띠, 즉 옥대(玉帶)와 같은 형국으로 본 것이다. 옥대는 비단으로 싸고 옥으로 된 장식을 붙여 꾸민 띠로서 왕이나 조정 신하가 공복(公服)을 입을 때 허리에 둘렀던 허리띠의 일종이다.

 

이 형국은 자손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공명을 누린다고 알려져 왔다. 띠는 바람이 불어야 나부끼기 때문에 남쪽에 나부끼는 모습의 산인 표풍(飄風)의 산 형태가 있는 게 최상격이다. 대죽리에서는 옥대형 원방산의 서쪽 골짜기 이름을 바람실[風谷:風室]로 지어 부름으로써 풍취나대의 규국(規局) 성립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풍취나대형의 묘지[음택] 터는 양쪽 띠를 묶는 매듭 자리가 혈처(穴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죽리에는 마을 뒷산에 있는 평산 신씨 묘가 이 형국의 대명당 터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해온다. 그렇다면 조선 10대 명형국지로서의 풍취나대형 한대마을 터[陽基]의 풍수 유적물로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동네 입구[洞口]를 지키고 있는 두 개의 돌[]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돌 자체도 예전의 그 돌이 아니고 또한 경지정리로 인해 놓인 위치도 다소 바뀌었겠지만 그 상징성만은 변함이 없다. 마을 안팎 어디에서 보든지 비단 허리띠의 앞부분[남쪽]이 연결되지 못하고 벌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을 돌[玉帶砂]을 놓아 이은 것이다. 현대식 요대(腰帶:벨트)에 비유하자면 허리띠를 둥글게 연결해주는 고리, 즉 버클(buckle:죔쇠)에 해당하는 것이 곧 그 돌들이다.

 

현재 주민들이 마을 안에서 밖을 향해 볼 때 왼편[동쪽]에 서 있는 돌을 숫바위, 오른편[서쪽]에 서 있는 돌을 암바위로 부르고 있지만 그리되면 돌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옥대사가 아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일종의 수살막이[수구막이] 돌로 바뀌기 때문에 풍수적인 차원에서 세워진 비보석(裨補石:보완 돌)이 아닌 민속학적 주술 차원의 돌로 변질돼 버리는 것이다.

 

어찌됐든 대죽리의 명당성이 그같이 봉황의 땅 내지 옥대형의 대길지로 알려지게 되니 전국 도처에서 명당 발복의 기운을 받으러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 게 아니라 김녕 김씨, 춘천 박씨, 안동 권씨, 경주 이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진주 류씨, 경주 최씨, 인천 채씨 등 성()이 다른 여러 명문가 사람들이 대죽리에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각성바지 촌()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런 마을은 대개 동족촌처럼 위계질서나 끈끈한 정이 없기 때문에 성씨 간 알력이나 말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대죽리 마을에 많은 성씨의 사람들이 살러 들어오기도 하고 또 이주해 나가기도 한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과객이 대죽리에 들렀을 때도 동네 사람끼리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는데 그것이 말무덤이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도대체 대죽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견구형(犬口形) 마을 터와 말무덤

우리의 전설에 등장하는 과객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들이다. 아는 것도 많고 처방에도 능숙해서 가는 곳마다 마을사람들이 안고 있는 난제들을 척척 해결해 준다. 대죽리 말무덤 전설에 등장하는 과객도 예외는 아니다.

 

 

▲ 말무덤 안내판

 

 

우연히 대죽리에 들렀는데 때마침 동네 사람들 간에 싸움이 붙어 욕지거리가 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개 주둥이를 닮았으니 동네 사람끼리 늘 옥신각신 말다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개주둥산 말무덤을 만들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거다.

 

 

▲ 말무덤 경관

 

 

아마도 그 과객은 아주 얕은 풍수 지식을 습득한 선비나 스님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풍수 고수였다면 대죽리 터의 풍취나대형[옥대형]’ 형국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며, 그랬다면 땅의 생김새와 사람의 싸우는 입 모양새를 유비(類比)시키는 유감주술(類感呪術) 같은 저급한 풍수론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말. 격언을 새겨 놓은 바위들

 

 

하지만 어찌하랴. 그런 얼풍수를 만나는 것이 대죽리의 운명이었던지, 아니면 당시의 사회풍토가 땅의 길흉과 사람의 길흉을 동일시하는 음양오행론적 풍수론을 일반상식으로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죽리[한대마을] 사람들은 의논 끝에 과객의 처방대로 평소에 내뱉은 상스러운 말들을 그릇에 담아 주둥개산에 묻었다고 한다.

 

 

▲ 말 무덤과 그 바로 밑의 분묘

 

 

말을 그릇에 담은 방법도, ‘그릇 뚜껑을 열고 말을 뱉은 후 다시 닫고 묻었다는 얘기도 있고, 또 지방(紙榜)을 쓰듯 상스러운 말들을 글자로 적은 종이를 그릇에 담은 후 묻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일종의 말 장례식을 치른 말무덤을 만든 이후로는 마을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욱하고 화가 치밀어도 마을 어귀에 있는 말무덤을 생각해 참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오랜 세월 그 말무덤이 미친 긍정적인 효과가 적잖아 보인다.

 

 

▲ 마을 뒷산에서 바라본 주등포산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말무덤 효과 너머에 있는 풍수의 세계를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주민들은 왜 과객이 조선 십명지로서 옥대형 대명당이었던 한대마을 터를 개 주둥이 형국으로 폄훼하는 데도 가만히 있었을까. 혹여 주민들도 과객보다 먼저 마을 터를 개 주둥이와 같은 형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주둥개산의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주둥개산은 옥대형 원방산의 왼쪽 줄기, 즉 좌청룡 지맥 끝 산이다. 원래 이름은 주등포산(舟登浦山)’이다. 말 그대로 배를 타는 개[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강촌이었던 대죽리는 신풍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큰물이 질 때 주등포산 턱밑까지 강물이 닿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배를 타거나 내렸다. 지금 대죽리의 바깥들[외명당] 이름은 웃개들과 아랫개들이다. ‘ ()이 아닌 ()‘의 의미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등포산이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을까. 네 글자 한자 중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게 바로 . 그것이 맨 먼저 순 우리말 로 바뀌었다. 그리되면 주등포산 주등개산이 된다. 그리고 주등개산이 자칫 잘못 발음되면 주둥개산으로 바뀐다.  주둥개산에서 []’ [dog·]’로 바꾸면 주둥개산이 되고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해 버리면 개 주둥이 산이 된다.

 

이 곡해된 주둥개산을 본래의 주등포산으로 일찍 바로잡았더라면 개 주둥이 이야기는 아마도 말무덤 조형물만 남긴 채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저 한 과객이 주등포산 주둥개산으로 오해하여 마을 터 전체를 개 주둥이 형상으로 잘못 말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그래도 그의 말 같잖은 처방책을 받아들여 말무덤을 만든 것은 그만큼 말싸움 동네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강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 산에 말무덤을 만들어 압승함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주민들끼리 말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믿게 됐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말무덤은 말무덤 대로 기능하고,  옥대형 내지 풍취나대형이라는 전통적인 명형국지 정체성도 그대로 온전히 전승돼 내려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민들은 주둥개산 개 주둥이 산으로 인식하는 것을 너무 긴 세월 동안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하다. 불과 이삼십 년 전부터 원방산의 왼쪽지맥은 곧게 뻗은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구부러져 길게 뻗은 위턱의 형상으로 마치 개가 짖어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안녕을 위해 개가 짖지 못하도록 앞니에 재갈을 물리고 송곳니를 누르는 돌을 세웠다고 하는, 실로 괴상망측한 풍수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위턱’, 아래턱‘, ‘재갈’, ‘송곳니 같은 말은 애초의 말무덤 전설에는 나오지 않던 말이다. 아마도 나쁜 기운을 누르는 풍수의 압승(壓勝) 내지 염승(厭勝) 술법을 아는 현대의 어떤 반풍수가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주둥개산 전설에 자신의 생각을 마구 덧붙여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버린 듯하다. 혹자는 어떤 교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고, 또 다른 주민은 정() 모라는 향토사학자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말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 김병오씨 마당에 놓여 있는 칠성바위 돌들.

 

 

필자가 현장 확인해 본 결과, 재갈 돌은 예전의 풍취나대형 옥대사(玉帶砂)였고, 송곳니를 누른 돌은 칠성바위였다. 현재 마을회관 마당에 세워져 있는 경로당 표지석과, 작고한 김병오씨 댁 앞마당에 모아 놓은 돌 서너 개가 경지정리하기 전에 마을 어귀 검박들 논에 있었던 칠성바위돌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앙[북두칠성 믿음]에서 비롯된 유물이지 짖는 개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장치한 풍수 압승물은 결코 아니다.

 

개 주둥이 산은 물론 재갈바위 같은 압승물 얘기는 모두 허구다. 지명도 왜곡됐고 경관물도 곡해됐다. 주민들이 전혀 그런 뜻으로 세워놓지도 않은 돌들을 제멋대로 개의 앞니와 송곳니 기운을 제압하는 풍수 압승물이니 뭐니 하면서 함부로 남의 삶의 터전을 폄훼한 것은 진리 추구는커녕 인간의 도리마저도 저버린 심각한 일탈 행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터넷에 얼토당토않은 그런 얘기들을 마구 퍼 담아 날라놓은 이들은 지금이라도 모두 삭제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진리도 아닐뿐더러 팩트도 아니다. 그저 일개 얼풍수가 왜곡된 주둥개산 지명에 자신의 풍수적 상상력을 억지로 덧붙여 놓은 궤변일 따름이다. 그 얼풍수는 대죽리 전설에 나오는 조선 중기의 그 지나가는 과객 수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직접 한대마을[대죽리]을 찾으시라. 그리고 직접 몸으로 땅기운을 느껴보시라. 남이 어떻게 그 터를 생각하고 어떤 말을 했는 가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 풍수의 진리는 책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말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터 자체에 있다. 참 진리는 때로는 햇빛[지식과 전통]이 가려질 때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 해복형(蟹伏形) 힐링 명당

잘 난 사람이 여러 개의 직함을 가지듯, 명기(明基)도 다양한 풍수 형국명을 갖는다. 사람들의 명당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방증이다. 대죽리 마을에 풍취나대형[옥대형]’ 명당을 아는 이는 한둘밖에 없지만 사람들은 그 터를 소쿠리 명당, ‘[]’ 명당, ‘삼태기 명당, ‘바소구리 명당 등 온갖 소박한 명당명(明堂名)으로 의미를 둔다.

 

 

▲ 해복형 명당 예시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鼻懸鈴]’식의 풍수 물형론[형국론]이 길지와 흉지(凶地)를 판별하는 절대 기준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형론에 가장 열광한다. 풍수를 잘 몰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삶터의 윤곽 특성을 쉽게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좋은 물형론이 곧 내가 명당 안에 실존하고 있다고 하는 일종의 환경심리적인 자존감을 고양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해복형 명당 대죽리 전경

 

 

필자가 대죽리의 고전적인 풍취나대형 명당설에다 지금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또 다른 명형국지 이름을 덧붙이고자 하는 것도 물형론이 지닌 바로 그런 긍정적인 파급효과 때문이다. 대죽리는 강가 마을이다. 그런 곳은 땅기운[地氣]에 못잖게 물 기운[水氣]이 강하게 작용한다.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는 무량한 수기를 반영한 지세 형국명이 필요하다. 유관 적합한 이름이 딱 하나 있다. 바로 해복형(蟹伏形)’이라는 명형국명(明形局名)이다.

 

대죽리 마을 터는 방게를 쏙 빼닮았다. 동쪽마와 서쪽마가 기대고 있는 곳은 []’의 몸통 부분이며, 동쪽의 주등포산은 왼쪽 집게발, 서쪽의 신풍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는 오른쪽 집게발이다. 게가 누워 있거나[蟹伏] 또는 게의 배[蟹腹]에 해당하는 터는 예부터 천자지지(天子之地) 내지 제왕지지(帝王之地)로 알려져 왔다. 주위의 산세가 언덕처럼 생긴 산이나 바위로 되어 있으면 극귀지지(極貴之地)로 치는데, 좌우의 구담리와 신풍리 쪽 야산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4대강 사업으로 신풍제방이 만들어지면서 낙동강물이 이제 더 이상 방게형 터인 대죽리 앞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룡경(疑龍經)에 따르면 해복형 터 앞에는 연못···강 같은 것이 있어야 하며 바위까지 갖추면 품격이 더욱 높아진다고 했다. 전자는 게의 활동무대요, 후자는 게의 먹이다.

 

대죽리의 경우, 마을 어귀 한 쪽에 자그마한 연못 하나를 만들면 수량 확보와 유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예전의 옥대사[암바위·숫바위]가 먹이 역할을 해줄 수도 있지만 경지 정리할 때 모아둔 칠성바위들을 연못 둘레에 옮겨다 놓으면 금상첨화다. 이 해복형 명당 경관이 완성되면 이제는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원방산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을 만들면 된다.

 

 

▲  한대마을 입구의 옥대사(암바위.숫바위)

 

 

원방산 능선길 이름은 원방길이 좋다. 그 길이 상징하는 의미는 음양길이요, ‘천지길이요, ‘태극길이다. 동쪽의 말무덤이 있는 봉우리는 말무덤봉이나 귀봉(貴峰)’으로 이름하라. ‘주등포산 주둥개산으로 변질되면서 마을에 큰 해악을 끼쳤으니 이제 그 이름은 문헌 속의 글자로만 남겨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주보고 있는 서쪽 끝 봉우리는 소원봉이나 부봉(富峰)’으로 명명하라. 동양철학에서 동은 권(), 서는 재()를 상징한다.

 

의 힘은 집게발에 집중돼 있다. 오른쪽 집게발의 힘이 왼쪽 집게발보다 크다. 공교롭게도 오른쪽 집게발인 원방산 서쪽 끝 봉우리가 신풍리 와우형 지세의 소꼬리(牛尾)’와 일치한다. 와우형 터에서는 소의 꼬리가 되는 장소도 혈()자리로 친다. 쇠파리를 쫓기 위해 늘 꼬리에 힘을 줘 휘두르기 때문이다.

 

 

 

 

 

, 이제 그런 상태에서 원방산 탐방길의 구경거리들을 한 번 물색해보자. ‘좋은 집터와 묘터도 있고, 고목도 있고, 정자도 있고, 고택도 있다. 마을 어귀 연못[만들어졌다고 가정함]에서 출발해 동쪽 말무덤봉[귀봉]을 거쳐 서쪽 소원봉[부봉]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해복형 지세와 비보 연못귀봉의 말무덤회화나무영모정만죽정평산신씨 묘[풍취나대혈]와 매죽헌퇴계 선생 외갓집 터소원봉[부봉]이다.

 

이 원방길 코스는 거의 원형으로 되어 있어 마을 안은 물론 바깥쪽의 아름다운 산과 강, 그리고 들이 어우러진 풍광들을 마음껏 조망할 수 있다. ‘말무덤은 이미 경북도청 신도시 둘레길 제4코스에 들어가 있는 탐방 명소다. 이 원방길이 완성되면 신도청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풍취나대형의 옛 명기는 개 주둥이 터로 추락한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해복형 대길지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말무덤봉[귀봉] 한 쪽에 구멍 뚫린 상자 책상을 비치해 관광객들로 하여금 성찰함(省察函) 속에 평소 내뱉은 상스러운 말들을 적은 종이를 넣게 하면 어떠랴. 마을 둘레길의 최종 귀착지인 소원봉[부봉]에서 자신의 꿈과 희망 사항을 적은 쪽지를 소원함(所願函) 안에 넣게 하면 어떠랴. 정월대보름이나 아니면 어떤 좋은 때를,  반성지(反省紙)’ 소원지(所願紙)’를 불태우는 날로 정해 마을 축제를 열면 또 어떠랴.

 

많은 사람들이 한대마을 말무덤을 찾아 지난 세월을 치유[힐링]하고 희망찬 미래를 소원봉에서 꿈꾸게 하라. 최고의 장소성(場所性)은 하드웨어적인 물리적 경관을 넘어 사람의 가치관과 태도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요소가 그 장소에 녹아 있을 때 진정으로 완성된다. 해복형 힐링 명당, 그 빛나는 정체성을 지닌 한대마을[대죽리]의 무궁한 건승을 기원한다. 현지조사에 도움을 주신 김녕 김씨 영사공파 김창빈(82), 김경화(80), 김국빈(73)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몽일 경북환경연수원 객원교수·풍수학박사]

 

 

정차모 기자 (jcm542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