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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백두를 가다] (22)三山三水의 고장, 예천

한봄김국빈 2009. 6. 15. 13:36

[낙동·백두를 가다] (22)三山三水의 고장, 예천
보부상 묵어가던 삼강나루 주막 옛 정취 그대로
 
 
 
▲ 삼강나루 옆 언덕에서 내려다본 낙동강은 강 중간의 모래섬에서 두 갈래로 물길이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삼강은 경북 북부의 물을 모두 모아 상주 땅에 명실상부 낙동강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 막걸리 생각이 절로나는 삼강주막은 보부상과 사공, 시인묵객의 쉼터였다.
 
▲ 삼강주막 뒤뜰의 들돌은 품값을 책정하는 도구다.
예천은 지난해 안동과 함께 경북도청을 유치했다. 예천은 도읍지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경북의 새 도읍지는 안동과 예천, 영주의 경계인 학가산에서 뻗은 검무산 일대다. 학가산은 안동의 진산이자 예천의 안산이다.

'예천기행'의 저자인 조동윤 예천군 시책사업과장은 "학가산은 사람이 학을 타고 노니는 모양을 따 그 이름을 지었으나, 실제 형상은 봉황으로 두 발이 안동과 예천 땅을 딛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이요, 영남 인물의 반은 안동, 안동 인물의 반이 예천에 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 예천의 지명에는 용(龍)자가 특히 눈에 띈다. 용혈, 용문, 용궁, 용두, 용뜰 등 수없이 많았다. 비룡의 기가 서려 있다는 의미인가 싶다.

예천 사람들은 "학가산과 주흘산(문경새재), 팔공산이 팔을 벌려 예천의 풍양면에서 맞잡으니 삼산이요, 봉화 오전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주흘산에서 시작된 금천, 태백산에서 내려오는 낙동강이 풍양면 삼강리에서 합수하니 바로 삼강"이라고 여기고 있다.

삼산삼수(三山三水)의 조화가 깃든 고장이자 백두대간(예천의 뒷 병풍이 바로 백두대간)의 정기가 서린 곳이 예천인 것은 분명했다.

일행은 삼산삼수의 상징인 삼강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유명한 삼강주막이 있다. 옛 삼강주막은 낙동강에서 마지막까지 문을 열었던 곳이다.

삼강은 낙동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태백산과 봉화 고산준령의 물을 품은 낙동강은 안동으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낙동강 동쪽의 가장 큰 지류인 반변천의 물까지 안동에서 다시 품어 예천 땅으로 그 몸집을 키워간다.

서쪽에선 낙동강 가장 큰 지류인 내성천이 봉화와 영주, 예천읍을 거쳐 문경에서 내려온 금천의 물까지 품어 삼강나루에서 안동에서 내려온 낙동강 물과 힘찬 포옹을 한다. 바로 삼강이다. 삼강은 낙동강 상류의 물을 모두 안은 뒤 상주 땅에 명실상부 낙동강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삼강이 경북 북부의 산과 물만 모았겠는가. 수 천년 사람과 '경제'가 모이고, 오간 곳이었다.

옛 나루터와 주막이 있었던 삼강은 삼강문화마을로 옷을 갈아입었다. 보부상숙소와 사공숙소, 주막이 여전히 길손들을 맞이하고, 서양의 맥주 대신 한껏 익은 농주(막걸리)가 길손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일행은 마을의 주막부터 찾았다. 낙동강의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작고)를 만나기 위해서다. 물론 주막의 처마 밑에 걸려 있는 옛 사진으로 말이다. 길손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고, 마루 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진 속 할머니는 무척 반가웠다. 주막의 방은 깨끗한 벽지로 새단장했지만 할머니는 그 속에 있었다. "막걸리 5,000냥, 지짐이 3,000냥, 두부 2,000냥, 주모한상주이소는 1,2000냥"으로 벽지에다 쓴 메뉴는 바로 할머니의 정취가 아닐까.

일행은 그냥 지나치면 후회할까봐 주막의 마루에 엉덩이를 붙여버렸다. 소박하지만 한 상을 차려 막걸리 속에서 잠시나마 보부상과 사공, 시인묵객이 되었다.

주막은 삼강나루를 찾은 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과 사공들의 숙소였다. 때론 시인묵객들이 잠시 세월을 낚는 공간이기도 했다.

삼강에는 1934년까지 보부상과 사공들의 숙소가 있었다. 당시 삼강은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활발했다. 안동과 예천, 봉화, 영주, 청송, 영양 등 경북 북부지방은 물론 영월 등 강원도 남부지방의 길손과 보부상까지 삼강을 찾았다.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했다. 밤이 되면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호롱불 아래에서 길과 마을 정보, 상거래 정보를 주고 받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삼강나루의 옛 모습은 1934년 대홍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2008년 지금의 삼강문화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주막 바로 뒤뜰에는 회나무가 있다. 바로 장터다. 소금, 쌀, 잡곡 등의 물물교환이 회나무 아래에서 이뤄졌다. 나루에는 나룻배와 농선이 운행됐다. 나룻배는 길손과 보부상이, 농선은 쌀, 잡곡, 소 등 가축이 '단골'이었다.

회나무 바로 옆에는 단단한 돌덩어리가 있다. 무게가 120kg이나 된다. '들돌'이다. 나루터에는 짐을 싣고 내리는 인부가 필요한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이 정해졌다. 힘이 장사급은 돼야 배에 짐을 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옛 낙동강 소금배는 삼강이 주 종착지가 아닐까 여겨진다. 강의 수량이 풍부하면 안동이나 내성천을 거쳐 영주에까지 소금배가 운행했지만 강의 수량이 적었을 때는 안동이나 영주 땅에서 내려온 나룻배가 삼강에 정박 중인 소금배에서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요즘 삼강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막걸리도 한 사발 할 겸 삼강에서 옛 정취와 낙동강의 위용을 다시 한번 느껴보면 어떨까.

이종규기자 예천·엄재진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조동윤 예천군 시책사업과장 함명수 예천군 내성천 리버로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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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5월 2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