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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백두를 가다] 예천의 미래, 내성천

한봄김국빈 2009. 6. 15. 13:29

[낙동·백두를 가다] 예천의 미래, 내성천
 
 
 
▲ 자연의 백미인 회룡포는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내성천 물이 휘감아돌아간다는데서 붙여졌다. 물과 마을, 백사장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다.
 
▲ 조선 선조 때 정승인 약포 정탁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
내성천은 낙동강의 서쪽 제1원류다. 장장 260리(106.29km)를 내달리고 있다.

봉화의 오전에서 발원해 영주를 거쳐 예천에서 드넓은 강의 모습을 갖춘다.

소백산의 남쪽 기슭 물을 다 받아낸 내성천은 예천을 가로질러 예천 풍양의 삼강에서 합류한 뒤 명실상부 상주에 낙동강의 물길을 열어 주고 있다.

강은 젖줄이다. 낙동강이 영남의 젖줄이라면 내성천은 예천의 젖줄이다. 봉화와 영주를 지나지만 예천의 내성천(42km)은 예천의 ‘전부’였다. 예천의 내성천은 참 부럽다. 수천년 역사와 문화, 문학을 한꺼번에 안은데다 지난해에는 경북의 새 도청 소재지도 품어 버렸다. 예천의 어제와 오늘이 내성천에 있고, 이젠 ‘천년 미래’도 열고 있으니 당연 부러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일행은 삼강에 이어 내성천 탐방에 나섰다. 내성천은 수많은 명현거유를 낳았고, 문학도 꽃피웠다. 여기에 살아 숨쉬는 생태도 가졌다.

예천은 인재의 고을이다. 고을 인재는 '내성천'에 소복했다. 안동 인재의 반이 예천이라더니 퇴계의 외가가 바로 지보면 죽림리 춘천 박씨 가문이다. 퇴계의 제자만도 31명에 달했다. 내성천에 유학의 향내가 곳곳에 묻어나는 이유가 퇴계에게 있는 것이다.

특히 예천 사람들은 퇴계 이전에 예천이 유학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컸다. 조선 초 성균관의 으뜸 벼슬인 정3품 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은 예천 차지였다. 송정 조용이 16년, 별동 윤상 16년, 나암 이문흥 20년 등 50년 이상 조선 초의 유학과 문묘의 관리를 총괄했으니 말이다. 조용은 조선 초 유학의 대이론가로 예천에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윤상은 조용의 제자다. 오로지 학문으로 군서기에서 대사성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종 때 성균관에 입학한 세자 문종을 가르쳤고, 왕세손인 단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사후 그의 비문에는 "저 중국의 구양수와 더불어 후세에 추모될 것"이라고 새겨져 있다. 용궁면 출신의 이문흥은 당시 유림에서 종지(宗之·유학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라 했다.

예천기행의 저자 조동윤 예천군 시책사업과장은 "고려 말과 조선에서 정승을 지낸 예천 사람도 7명이나 된다"고 했다.

내성천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내성천이 반달 모양으로 굽이치는 그 중간 지점의 강변 절벽 위에 서원이 보인다. 바로 도정서원(호명면 황지리)이다. 예천이 배출한 정승 중의 한 명인 약포 정탁의 위패를 모신 곳이자 약포의 셋째 아들인 청풍자 정윤목을 추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청풍자는 당대 성리학자요 초서의 대가로 삼강주막으로 유명한 삼강마을을 개척한 분이다. 약포는 조선 선조 때의 정승으로 서애 유성룡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을 신원한 인물로 유명하다.

실학의 거두인 다산 정약용도 당시 고을 원님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예천에 왔다. 17살이었던 다산은 예천의 반학정에서 과거공부를 했고, 내성천을 유람하며 글도 남겼다.예천 사람들이 다산의 실학사상이 움튼 곳이 예천이라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인연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예천의 인재가 이들 뿐이랴. 고려 말 절개를 지킨 이들도 예천인이었다. 고려 멸망 후 두문동 72현(두문동에 은거해 밖으로 나오지 않은 고려의 충신 72명·두문불출과도 연관이 있다) 중 10명이 예천 출신이거나 예천에서 살았던 분들이다.

인재의 보고 내성천은 문학의 향기도 뿜어냈다.

감천면 덕율리의 옥천서원은 서하 임춘을 모시고 있다. 예천이 본관인 서하는 우리나라 가전체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국순전과 공방전을 쓴 고려의 대표 작가이다. 고려에서 시작한 예천의 문학 혼은 지금에까지 이르러 우리나라 국문학의 태두인 도남 조윤제 박사가 바로 예천인이다.

왜 예천에 인재가 많은 걸까. 일행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강이 있으면 마을이 있고, 마을은 명문가와 인재를 낳는다고.

함양 박씨의 용문 금당마을, 예천 권씨의 용문 죽림마을, 안동 권씨의 용문 맛질마을, 한양 조씨의 감천 산골마을, 진성 이씨의 호명 백송마을, 동래 정씨의 우망마을, 청주 정씨의 고평마을과 삼강마을, 축산 전씨 영궁 소천마을 등은 예천을 대표하는 가문들이다.

또한 내성천은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내성천은 은빛 백사장이었다. 바닷가 해수욕장도 아닌, 그것도 강의 하류도 아닌 강 상류의 깊은 산골의 천(川 )에 축구장을 수십, 수백개나 지을 만큼의 백사장을 가진 곳이 바로 내성천이었다.

낮에는 은빛 모래에 눈이 부시고, 밤에는 달이 백사장에 꽃을 피우니 말이다.

일행은 중앙고속도로 예천 방면을 지날 때마다 은빛 내성천의 아름다움에 수없이 가슴을 두근거려야 했었다.

일행은 다시 호명 백송리(옛 지명은 백사장이 백금같이 반짝인다고 해서 백금리였다)의 선몽대를 찾았다. 내성천을 대표하는 경승지다. 선몽대 입구에는 수백년이 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백사장과 어우러져 내성천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갓끈 풀고, 도포를 벗은 뒤 머리 속을 비우고 싶은 마음이 덜컹 생기는 것은 뭘까. 그래서 내성천은 그 옛날에도 명현거유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퇴계는 도산에서 선몽대의 아름다움을 못잊어 시로 노래했다.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도 선몽대에 시 편액을 남겼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를 쓴 청음 김상헌도 고향인 안동 소산에서 10리에 불과한 이곳 선몽대를 오가며 시를 남겼고,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도 선몽대를 찾아 시를 썼다.

내성천 자연의 백미는 선몽대를 지나 회룡포(의성포)에 이른다. 삼강마을 뒤 비룡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회룡포는 물과 마을, 백사장이 만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늘 보아온 사진 속 회룡포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회룡포는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내성천 물이 휘감아돌아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재와 문학, 생태가 꿈틀거리는 내성천은 수백번 보고 또 보고픈 존재였다.

이종규기자 예천·엄재진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조동윤 예천군 시책사업과장 함명수 예천군 내성천 리버로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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