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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破落戶)’라 불린 남자

한봄김국빈 2019. 1. 25. 09:52

'파락호(破落戶)'라 불린 남자

 

 

파락호’(破落戶,깨트릴파,떨어질락,집호)라는 말은 양반 집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뜻합니다.

요즘 말로는 인간 말종 쯤 될까요?

 

일제 식민지 때 당대 경북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던 파락호 중에 퇴계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의성김씨 학봉파의 명문가 후손으로서 학봉 김성일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습니다.

당시 경북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다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실패 하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모른 채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 약 400억 원도 다 팔아 먹고 아내 손을 잡으며 "미안하오. 오면서 깊이 뉘우쳤소. 이제 달라지겠소." 라는 약속도 잠시 다시금 땅 문서를 들고 노름판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 주곤 했습니다.

집안 망해 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당시 양반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시집 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 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마저도 친정아버지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 수 없어서 친정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천하의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 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내졌던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노름꾼, 주색잡기, 망나니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위장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왜경들의 관심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

라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일제 때 김용환의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 줬다는 이유로 왜경에게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항일의 뜻을 품게 되었고, 평생을 철저하게 망나니 행세를 하면서 노름판을 전전하는 노름꾼 파락호로 위장을 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김용환의 호국정신 이야기는 가슴 속 깊이 찐한 감동을 줍니다.

지금 경북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에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 김후옹 여사는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1995)을 추서받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 딸 김후옹 여사는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이렇게 발표합니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 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 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 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 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는 아닐진데........"

 

*독립지사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김후옹님의 글

 

-옮긴 글-